한때 명계남이 말했지, 돈만 주면 작품한다고

2011. 9. 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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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기자]독립다큐멘터리 < 뉴타운컬쳐파티 > (연출 정용택)는 홍대 앞 두리반 투쟁을 함께했던 인디밴드들의 이야기다. 이후 이들은 '독립'을 넘어선 '자립'을 외치며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만들기에 이른다. < 뉴타운컬쳐파티 > 는 사회적 제작을 표방한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개인과 단체들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모은다. 만들어진 영화는 1년 후 공개 라이선스로 전환해 사회에 환원된다. 수익은 독립영화 제작지원금, 인권-철거-인디 음악에 공공 기부된다. 사회적 제작은 대기업과 유통자본은 돈을 벌지만, 창작자들은 굶주리는 현실에서 대안적 저작권을 모색하고, 지속 가능한 독립영화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한 시도다. 이러한 사회적 제작을 위한 제언을 4회에 걸쳐 싣는다. < 편집자말 >

2010년 노동절, 황량한 공터로 사람들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재개발 부지 한가운데에 섬처럼 외로이 떠있는 건물에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60여 팀의 인디음악인들 그리고 수천 명의 젊은이와 나이든 이들이 '두리반'에 모여 노래하며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전국 자립 음악가 대회 51+' 혹은 '뉴타운 컬처 파티 51+'라 불린 이 페스티벌은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만든 축제이자 시위였다.

얼마 전에 헐릴 때까지 그 건물은 여러 장르 예술인들의 소굴이었고, 몇몇 뮤지션들의 모임인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의 산실이었다. 외국에선 국가와 기업이 지원하여 만들어주기도 하는 예술촌(아트 빌리지)이 국가와 기업에 등 떠밀린 곳에 생겨난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곳을 드나드는 음악인들 옆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따라붙었다. 책을 내고 출판을 기념하는 북 콘서트를 열면서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날에도 정용택 감독은 카메라와 함께 찾아왔다. 재개발의 문제와 독립음악인들의 상황, 그리고 그 둘의 연대와 문제공유가 다큐멘터리로 기록되고 있었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재개발과 철거민이, 제아무리 좋은 음악을 해도 TV에 나가 서바이벌에 참가하지 않으면 밥벌어먹기 힘든 음악인이, 가끔 '독립영화가 대박이 났다'는 들뜬 뉴스 뒤에 맨손으로 작품을 만들어가야 하는 독립영화인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침대에서 본 현실이 아니라 현장 속의 현실을, 그리고 모두 알고 있지만 모두 외면하는 사실을 기록하는 작품의 소중함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자본을 불편하게 할 때, 국가를 불편하게 할 때 자본과 국가는 이 소중함을 과감히 외면한다. 대신 외면 받는 이가 외면 받는 이를 주목한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더 강해진 검열의 시대

영화 < 뉴타운컬쳐파티 > 의 한 장면.

ⓒ 정용택

과거에는 검열과 통제가 국가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신뢰보다 독재정권을 불신해 '빨갱이'가 많아진 시대였다. 박목월 시인도 참여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예술과 문화를 그들만의 윤리로 심의했다. 꼭 필요하지 않은 교정과 검열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졌고, 작가를 무시하는 태도와 편집장 테이블의 권위의식은 빨간 볼펜이 바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검열만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이어진 '국전'처럼 각종 관전과 관제단체를 통하여 체제에 순응하는 길이 안내되었다. 근래 이슈가 되고 있는 청소년유해물 판정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허탈을 넘어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약자를 억압하는 심의는 다수가 여성인 '비스트'의 팬들이 여성가족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이제 이런 심의는 시대착오적인 구태가 되었다. "가사를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별 영향력 없는 (영양가도 없는) 반론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더 성능 좋은 빨간 펜이 자본의 손에 쥐어졌다. 영화를 발전시키고 음악의 오늘이 있게 한 시장이 대중예술 주위에 선을 긋고 차단막을 세웠다. 처음엔 하고픈 말을 마음껏 하던 음악인도, 하고픈 말을 하려던 영화인도 일단 성공하고 나면 그 누구보다 상업적인 행보로 투자자를 안심시킨다.

시장의 발달과 산업논리에 의하여 해결된 것보다 미해결된 문제들이 더 많아졌다. 경쟁을 통하여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준이 향상된다는 것은 스포츠에는 통해도 예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아니 가끔은 시장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대기업이 각 방면으로 진출하면 가격경쟁효과가 있다는 아첨은 실제로 들어맞지 않는다. 시장의 제1법칙은 언제나 이익증대이다. 결국 자신이 강조한 기준에 의하여 공격받을 운명의 논리다.

더구나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 좋은 지표와 순위는 최하위인 대신에 비슷한 노동시간, 교육비와 교육(입시노동)시간, 언론자유, 삶의 질, 불평등 등 나쁜 건 죄다 최상위권을 자랑하고 있다. 규모는 있으나 존경할 수 없는, 별로 부럽지 않은 나라이다.

그래서 몇 해 전의 '촛불'과 같은 저항은, '희망버스'와 같은 연대는 일개 사안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며칠 동안 내린 폭우로 하수관이 가득 차 있을 때 어딘가로 튀어 오른 맨홀뚜껑이다. 그 하나의 맨홀뚜껑은 자본의 논리만 강조하고 노동의 권리는 무시하는 사회 속의 분출일 뿐이다.

그렇게 어두운 그늘이 너무 많고 들춰서 보여줘야 할 상처가 너무 많다. 그 역할을 외부에서 많은 자금을 끌어와 그만큼의 수익을 내야하는 작품에 기대하긴 힘들다. '그땐 그랬지' 아니면 '저런 일이 있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옛날이야기 같은 후일담과 영웅담을 보며 손수건을 적실 뿐이다. 자본의 우산 아래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은 한정되기 마련이다.

문화'산업'이 '문화'산업을 억누르다

꽤 오래 전에 TV에 나온 명계남 씨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언가요?"라는 질문에 "돈만 주면 합니다"라고 답했다. 질문자는 웃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명계남씨는 다시 같은 답을 했다.

이러한 '농담'이 차라리 솔직한 이 때, 과거에 친일파와 독재 부역자들이 예술이 좋아 의와 리에 눈감았다면 지금은 돈이 좋아 예술에 눈감고 있다. 예술과 음악의 이념 봉사에는 극도의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조차 자본을 위한 부역은 당연시한다. 한때는 쿨한 것처럼 보였지만, 자본으로 수렴되는 논리에 자기도 모르게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쿨(cool)하려다 바보(fool)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비평가나 애호가로 행세한다.

다른 편에도 비슷한 현상이 생긴다. 게으른 좌파는 지금 현실에서 예술은 사치거나 취미 정도로 여긴다. 예술인들의 권리와 처우는 차후로 미뤄도 된다고 여긴다. 그러면 여유가 있는 이들과 수익을 내기 위해 상업성에 몰두하는 이들만 남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예술과 음악만 남는다. TV를 켜놓고 크리넥스를 준비해둬야 하는 것들만 남는다.

그래서 시장주의의 강화는 다양한 예술의 생존 기반을 무력화할 뿐만 아니라 탈정치화를 강요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선 예술의 정치색이 강조된다면 시장주의 국가에선 정치색 탈색을 요구받는다. 이런 주장을 한국에서 하면 반(反)시장주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족벌경영과 지역경제 분할이 당연시되어 사실상 봉건자본주의사회에 가까운 한국이야말로 반(半)시장국가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먹고 산다. 남보다 잘살 수 있다는, 그렇게 불평등해질 수 있다는 것이 동기부여가 된다. 인민은 화폐의 빌딩이 꼴 보기 싫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러한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제한함으로써 구조를 건드리는 것을 경계하는 경향이 보수의 특징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인간들이 모여 있어도 사회는 비도덕적일 수 있다. 합리성이 모여 비합리성이 되고, 반대로 비합리성이 모여 합리성을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세상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비합리적일 것이다. 지금 한국과 자본주의는 합리적 야만사회를 일상으로 만들었다.

더 근원에 있는 문제는 대중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체계적인 분리이다. 과거에 예술의 생산자는 특별한 누가 아니었다. 소수에게 그 임무가 주어진 것은 대중예술의 산업화 이후에 생긴 변화이다. 그런데 산업화로 불리는 다단계 구조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발생하고, 음악업계에는 표절에 책임을 지지 않는 문제가 생겼다. 책임분산사회가 도래했다. 곳곳에 대중예술이 넘쳐나지만 정작 생산자와 소비자는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창작자는 뭔가 납품업자가 된 기분이고 수용자는 어딘지 구경꾼이 된 기분이다. 그렇기에 시장논리와 주객분리를 의심하고 자본의 힘과 시스템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시장논리를 극복해보려는 시도가 존재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 주체와 객체, 현실과 예술이 분리되어 가는 시대에 창작의 주체성과 수용·향유의 주체성을 자극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부정적인 압력을 긍정적인 잔치로 되받아치기

아이돌가수 비스트

ⓒ 큐브엔터테인먼트

사람은 누구나 창작참여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편리한 기기의 보급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조건의 만족이다. 사진의 유행은 창작욕을 그림보다 간편하게, 음악보다 빠르게 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계를 새롭고 신선한 눈으로 보는 사진이 발견되기도 한다.

음악동네에서는 일찌감치 뮤지션과 팬이 함께 앨범을 함께 만드는 방식이 시도되어 왔다. 오지은이 그랬고, 시와가 그랬고, 최근에 꽃다지가 그랬다. 제작비만이 아니라 갤럭시 익스프레스처럼 팬들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거치며 앨범을 만든 사례도 있다.

그런데 영화의 경우에는 음반제작과 달리 인건비를 비롯하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그 영화가 큰 이윤을 창출하기 힘든 독립영화라면, 더구나 자본을 불편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라면 더 힘들어진다.

그동안 수차례 언론에 소개되었듯이 '뉴타운컬쳐파티'는 '사회적 제작' 방식으로 주목받았다. 자발적인 모금으로 제작비를 모으고, 그 금액 중 상당비율을 사회에 환원하며, 영화를 일정기간 후에 공유하는 기획이다. 네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이다.

첫째, 자본의 종속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의미가 있다. 둘째, 시장 안에 있으면서 시장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는 대안적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셋째, 사회를 직시하고 약자·소수자의 편이 될 수 있는 조건의 시도가 된다. 그리고 넷째, 누구나 창작과정에 참여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진보적인 독립영화의 진보적인 제작과정이 영화의 생산에 수용자가 참여하는 기초적인 방식을 제공하게 된 셈이다.

문화산업이 발달했다는 지금, 영화 관객이 얼마를 돌파했고 K-POP 한류 관객들이 얼마나 몰려들었다는 식으로 거대한 모래 댐에 찬사를 보내는 지금, 애석하게도 시장콘텐츠가 아닌 대중예술은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꼭 필요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소품으로 대우받는다.

그래서 의미 있는 예술작업과 가치 있는 시도가 성공모델까지는 아니더라도 긍정적인 모델이 되어준다면 어려움에 봉착한 독립예술에 응원이 될 것이다. 나아가 방어적인 궁여지책이 아니라 공세적인 지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타운컬쳐파티'는 애초부터 사회의 부정적인 압력(뉴타운)을 긍정적인 잔치(파티)로 되받아치는 것이다. '새로운 동네의 문화 잔치'였다. '새로운 문화동네를 일구려는 잔치'가 될 수 있을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파티 초대장은 그 곳에 자기 이름을 스스로 적어 넣으면 완성된다.

자신이 움직일 때 가능성이 태어난다

대안의 제시는 처음엔 늘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것이 현실적인가? 중세에는 농노의 존재가 현실적이었다. 산업혁명기에 영국에선 아동노동이 현실적이었다. 지금 한국은 광장을 두려워하는 집단의 존재가 현실적이다. 도심 복판에서 경찰이 시민들을 구타하고, 한겨울에 철거민들이 옥상에서 죽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어지간해선 누구도 부자가 되기 힘들다는 것도 이미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당연해진 것들을 위해 노력하고 동조한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감옥이 개선되었고, 신분에 따라 입는 옷조차 달랐던 때와 달리 패션이 민주화되는 과정도 있었다. 없었던 걸 받아들이기보다 있었던 걸 버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수고일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달리는 차의 창문에는 바람이 인다. 잔잔한 바다를 가르는 배에는 파도가 인다. 가능성은 상대적이다. 자신이 움직일 때 비로소 가능성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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