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최고봉' 인간보다 더 사려깊은 달팽이의 삶

입력 2011. 9. 2. 21:20 수정 2011. 9. 2. 21: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병상서 우연히 만나 쓴 관찰기

자기 보금자리 된 식물 안먹고

죽은 채소만 먹어 생태계 연결

'느림'으로 3만종 분화 '고등생물'

달팽이 안단테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ㆍ김병순 옮김/돌베개ㆍ1만3000원

미국 여자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에게 가혹한 운명이 찾아온 것은 서른네살 때, 하필이면 유럽 여행 도중이었다. 알프스 산맥 부근에 머물던 베일리는 어느날 아침 몸을 가눌 수 없는 고통에 쓰러진다. 7년 뒤 '후천성 미토콘드리아병'이란 걸 알게 되기 전까지 그는 왜 아픈지도 모른 채 침대에 누워 홀로 투병해야만 했다.

그에게 어느날 한 친구가 뜻밖의 선물을 건넨다. 제비꽃 한 포기를 심은 화분이었다. 하지만 진짜 선물은 화분 속에 있었다. 바로 달팽이 한 마리. 우연히 숲에서 주운 달팽이를 친구는 "그냥 네가 그걸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왔다며 주고 갔다.

달팽이를 길러보기는커녕 관심조차 없었던 베일리는 난감해진다. 껍데기 속에 꽁꽁 숨은 달팽이는 죽은 건지 산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와 친구는 도대체 무슨 권리로 달팽이의 삶에 끼어들었단 말인가? 달팽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는데."

달팽이에 신경쓸 힘조차 없이 받아만 놓은 바로 그날 밤, 베일리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바뀐 환경에 놀라 꼼짝 않던 달팽이는 저녁이 되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부드럽고 우아하게 화분 주변을 탐색하는 달팽이의 모습은 베일리에게 새로운 발견이었고, 그 여유로운 몸짓은 뜻밖에도 실로 매혹적이었다. 몸이 건강할 때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달팽이가 침대에 홀로 누워 꼼짝 못하며 달리 바라볼 것도 없는 상황에서 보게 되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다.

중증 인간 환자와 '납치된' 연체동물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됐다. 베일리는 하루하루 달팽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태극권 고수처럼 물흐르듯 움직여 홍합껍데기에 고인 물을 마시고, 자기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주는 제비꽃은 절대 뜯어먹지 않고 시든 채소만 먹는 사려깊은 작은 생명체. 달팽이는 숲속의 은자와도 같았다. 자기 몸 크기의 몇만분의 일도 안 되는 발 하나짜리 동물에게서 그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달팽이와 나는 둘 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달팽이도 나처럼 어딘가에 강제로 버려지고 추방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일리의 책 <달팽이 안단테>는 병든 그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달팽이와 함께 보낸 시절을 정리한 책이다. 다른 할 일이 없어 달팽이를 관찰하게 된 그는 이후 몇년 동안 온갖 자료를 뒤져 달팽이를 공부해 이 책을 썼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로 가득하다"고 했던 것처럼 그는 친구가 괜히 준 달팽이 한 마리 때문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고 결국 달팽이에 대한 책을 썼을 정도로 인생이 달라졌다. 그가 달팽이를 통해 알게 된 삶의 깨달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모르는 달팽이의 놀라운 면모를 소개하는 자연과학 교양서이자 빼어난 인생 에세이다.

달팽이와 인간은 머나먼 옛날 진화의 갈림길에서 창자와 심장, 허파를 가졌다는 공통점까지만 함께한 다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아갔다. 완전히 동떨어져 보이는 이 두 종 사이를 베일리는 아름답고 간결한 문체와 탁월한 설명법으로 넘나들며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달팽이의 이빨이 수천개라는 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죽을 때까지 오직 서른두 개의 이만으로 버텨야 하는 내 처지와 비교할 때 달팽이 이빨이 부러웠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만들어낸 종보다 자연스럽게 이빨을 바꿀 수 있도록 진화한 종에 속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

책을 읽고 나면 달팽이는 결코 끈적거리는 점액이나 묻히고 다니는 하등동물이 아니라 살벌한 생태계에서 '느림'을 자기의 생존 방식으로 삼아 3만종 넘게 분화하며 살아남은 진화 메커니즘의 결정체이며, 지렁이가 토양을 비옥하게 하듯 죽은 생물체를 먹어 생태계를 연결해주는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그림 돌베개 제공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