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12> 난세 속 푼수 같았던 미당

2011. 6. 2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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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님~" 유치장을 웃긴 일급시인 서정주5·16 직후 검거 선풍에 운 나쁘게 경찰서 잡혀가저명인사 불구 '사람 냄새' 짙게 풍겨서 더욱 존경끝까지 정신만은 말짱했던 마지막 모습 못 잊어

1961년 두 번째로 판문점에 갔던 내가 소련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챠지 기자의 인터뷰 신청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던 것은 썩 잘 한 일이었고 요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가 두 번째로 판문점을 다녀오고 나서 불과 1주일 쯤 뒤에 바로 5ㆍ16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 며칠 동안을 나는 전전긍긍하며 피신해 있기까지 했다. 혹여, 그 얼마 전의 사상계 3월호에 실린 '판문점' 소설을 읽은 얼룩무늬 군복 차림들이 그 소설의 작자인 나를 잡으러 오지 나 않을까 잔뜩 겁이 났었다. 그 작품 내용은 당시로서는 그 정도로 파격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소설이라곤 하지만, 그 무렵의 남과 북 체제를 1대 1로 동격(同格)으로 마주 세웠다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북 체제의 논지(論旨)나 주장을 비록 북쪽 체제의 여기자의 입을 통해서일망정, 이 남쪽에서 활자화시켰다는 것부터가 그 군인들의 기준으로서는 국헌(國憲) 위반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내가 진정으로 겁났던 것은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털어놓거니와, 북쪽 당국에다 내가 지금 남한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경로를 통해 알려주었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물론 이 점은 오직 나 혼자만이 알고 있고, 그 밖에는 북쪽의 그 처녀 여기자와 그녀의 보고를 받고 득달같이 나를 찾아 와, "그게 이 동무란 말이오?" 하곤 그 쪽 사진기에다 내 모습을 담아간 그 북한 군인뿐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5ㆍ16 직후의 살얼음판 같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는 그냥 홀홀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령 한창 검거의 회오리 바람이 휩쓸던 그 무렵 성균관대학 교수였던 조윤재 박사의 꼬드김으로 우연히 어느 모임에 나갔던 미당 서정주 시인까지도 중부 경찰서에 잡혀가는 판국이었으니까.

뒤에 그 무렵의 이야기는 한 동안 문단의 우스개 소리로 떠돌기도 하였지만, 진보당 조봉암 당수의 친 사위였던 이봉래 시인도 같은 중부경찰서에 잡혀 갔었는데, 그 유치장 안에서의 미당의 행태는 여러 가지로 웃겼다고 한다.

독방에 갇힌 미당이 아침 저녁으로 때없이 "간수니임, 간수 나으리, 지금 몇 시나 됐습니까요?" 하고 묻는다거나, 그 밖에도 뭐라 뭐라 혼자 구시렁거리던 행태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이 나라 제 일급의 시인일까 보냐 싶어질 정도로 웃기더라는 것이다. 그야, 그런 점으로라면 동리나 조연현 같은 사람은 애당초에 잡혀올 리도 없었다.

그 점, 미당은 시 하나는 끝내주게 잘 쓰는지는 몰라도 사람들 사는 평상인 쪽으로는 말 그대로 '푼수'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 정도로 푼수여서 어쨌다는 말인가. 나 같은 사람으로 말 한다면 그 때도 바로 미당의 저런 점이 기똥차게 좋았던 것이다. 아니 말은 바른대로, 좋았다기 보다는 제대로 생긴 시인다워 보였다. 처음부터 웃기는 구석이 전혀 없는 조연현 같은 사람 보다는, 타고난 자연 그대로의 사람 냄새가 짙게 풍겨서도 좋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저래서, 저렇게 푼수 대가리여서 바로 이 나라 제 일급의 시인이 아니겠는가. 6ㆍ25 초기 북한군이 밀고 내려올 때도 그이는 고향 쪽으로 피신을 하여,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노상 실성한 사람 같은 소리를 해 대어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만, 바로 그런 와중에서 그이는 '무등을 보며'나 '산중문답' '상리과원' 같은 이 나라 시 역사에 뚜렷하게 각인(刻印) 될 걸작들을 무더기로 내놓기도 했었다.

그 시들을 게재했던 '현대공론'지의 편집장이었던 이종환 같은 분은 두고두고 그 시들 두어 편을 자기 잡지에 실었던 것을 평생의 보람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요컨대 제대로 된 시인이란, 예술가란, 난세 속에서는 바로 그런 주책 바가지요 푼수 대가리였음을, 나는 5ㆍ16 직후 중부 경찰서에 잡혀 들어 갔던 미당의 행태에서도 예외 없이 보고 있었던 셈이다. 난세란 바로 그러해서 난세가 아니겠는가.

특히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것은, 내가 겪은 미당과의 마지막 만남이다. 그이가 삼성 일원 병원 10층의 독방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병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미당께서는 바로 초입에 반듯하게 누워 잠이 들어 있었는데, 안쪽 창가에 큰 며느리가 혼자 앉아 있다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남편 승해는 급한 일이 있어 못 오고 자기부터 미국에서 왔노라고 하면서 마산 출신의 그녀는 아주 반가워하며 옛날에 한 때 같이 어울렸던 시절을 자연스럽게 화제로 꺼냈다. 그렇게 모처럼 만나 얼추 한 시간이나 지났을 정도로 수다를 떨다가 나는 이만 가 보겠노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로소 그녀도 미당 쪽을 흘깃 쳐다보곤 "주무시고 계시니, 그냥 조용히 나가시죠, 뭐" 하였다.

나도 그럴 요량으로 가만가만 발 걸음을 떼며 이게 미당과의 마지막이겠구나 싶어 그냥 누워계신 미당 쪽을 한번 쳐다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당의 한 팔이 겅중 들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며 그 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싸 쥐었다. 아직은 온기가 따듯했다. 그러면서 나도 나대로 생각했다.

아아, 이 분은 끝까지 정신만은 이렇게 말짱하시구나, 이렇게 우리 이야기도 줄곧 듣고 계셨구나, 그러니까 이 분의 머리는 이승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이렇게 맑으셨구나, 역시 역시 역시...

그 이틀 뒤에 미당은 이승을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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