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새내기 교사의 '인생 스승', 억척 농군 옥자 어머니 / 정해숙

2011. 5. 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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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⑪

송정고등공민학교에서 처음 맞은 1962년 5월 농번기, 믿음직스런 반 아이들의 말에 안심하며 모내기 날을 맞았다. 저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운동장에 모여 생활지도부장 선생님의 주의와 지시사항을 들은 다음 학급별로 출발할 시간이 됐다. 그런데 우리 반은 출발을 할 수가 없었다. 하늘같이 믿고 있었던 반장 옥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전화로 금방 확인할 수도 없고, 집은 아주 먼 평동면이었다. 그 아이만 믿고 있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반 아이들과 운동장 가운데 서 있었다. 걱정만 가득 안은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옥자의 남동생이 뛰어왔다. 옥자 동생은 2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반장을 맡고 있었다. 가쁜 숨을 쉬며 뛰어와서는 편지를 건네주기에 읽어보니 '선생님 죄송해요. 새벽에 토사곽란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 '날벼락이란 이런 것일까' 싶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정신을 가다듬고 아이들을 모아 부반장에게 상황을 얘기하고 학생들을 앞세워 가는데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 아무 자신도 없이 정말 기가 막힌 순간이었다.

우리 반이 모내기를 돕기로 한 평동면에 도착하니, 면사무소에서 직원 2명이 나와 있었다. "왜 이제 오세요?" 그들은 한참 기다렸다며 반겼다. 나는 나대로 도움 받을 사람들을 만났다 싶어 너무 반가웠고 힘이 솟았다. 그런데 그들은 "선생님이세요? 이 논하고 저 논하고 두 군데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또 다른 데로 가봐야 합니다" 하더니 휑하니 가버리는 것이었다. 담임으로서 총지도를 해야 하는데 들판에 서서 막막할 뿐이었다. 부반장을 불러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의논하는 순간, 애들이 합창하듯 외쳤다. "옥자 엄마 오신다!" 저 멀리서 몸뻬 입은 아주머니가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었기에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옥자 어머니가 먼저 인사를 했다. "선생님 염려 마세요. 우리 옥자가 어떻게 걱정을 하는지, 선생님은 자기만 믿고 계실 텐데… 하도 애를 태워서 제가 대신 아이들과 모를 심으로 왔으니께 선생님은 여기 가만히 계세요." 그러면서 한사코 내 팔을 잡아끌어 앉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로봇'이었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고, 옥자 어머니가 "누구 누구 줄 잡아라, 몇 명은 모 나르고, 누구는 모 심어라" 진두지휘를 하고, 아이들은 그에 따라 모를 척척 심으며 일사불란하게 모내기를 끝내는 것이었다. 건강하고 당당한 농촌의 아주머니, 옥자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참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옥자 어머니의 모습은 구세주일 뿐 아니라 새내기 교사인 내게 큰 스승이었다.

모내기를 끝낸 옥자 어머니가 묶었던 수건으로 몸을 탈탈 털고는 "시골 일이 바뻐서 나 그만 갈랍니다" 하고 말할 때에야 나는 "어머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옥자는 좀 괜찮은가요?" 하고 물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옥자가 참 성실하더니, 얼마나 자기 책임을 얘기했으면 어머니가 딸 대신에 달려와 일을 해낼까,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 참으로 감동의 순간이었다.

옥자 어머니는 그 뒤에도 광주리를 이고 가끔 학교에 와서는 직접 길러 딴 주먹만한 수박 두세 덩어리, 못난 참외 몇 개를 꺼내놓곤 했다. 또 집 마당에서 애호박을 땄다며 전을 부쳐 오기도 했다. 옥자의 학교생활부에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쓰여 있었으니, 아마도 혼자 농사지으며 애들을 키우는 모양이었다. "하실 일도 많은데 뭘 이렇게 갖고 오세요" 했더니 "선생님, 이 학교 없으면 우리 애들은 다닐 데가 없어요. 저는 이 학교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하는 것이었다.

옥자 어머니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오려 한다. 비록 집안형편이 어려워 고등공민학교에 다니지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렇게라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하며 책임을 다하는 건강한 모습을 보면서 교사로서의 책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 학교인 고등공민학교에서 나는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교육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스승의 자세를 실천으로 보여준 학생 어머니로부터 배우면서 교단생활을 시작한 행복한 교사였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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