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환의 백 투 더 KBL] 적이 된 '황금콤비' 허재 vs 강동희

최창환 기자 2011. 4. 2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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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조니 맥도웰, 김승현-마르커스 힉스. 그리고 주희정-마퀸 챈들러. 지난 1997년에 닻을 올린 KBL이 배출한 눈빛만으로도 하이라이트 필름을 척척 연출해냈던 콤비들이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던 콤비도 있지만 이들은 팬들에게 국내선수와 외국선수라는 조합이 얼마나 멋진 영상과 팀 전력에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각인시켜줬다.

하지만 이들만큼 한국농구의 부흥을 이끌었던 콤비가 또 있을까. 1986년 중앙대에서 만나 '중앙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들은 실업에서도 기아자동차에 나란히 입단, '기아천하'를 연출하며 농구가 최고의 겨울 스포츠로 자리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허재는 한국농구가 배출한 이 시대 최고의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다. 득점이면 득점, 경기조율이면 경기조율, 그리고 승부근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천부적인 기량을 뽐냈던 선수다. 오죽하면 '농구 대통령'이라는 칭호까지 붙었을까.

강동희는 허재와 같은 다재다능함은 떨어진다. 하지만 포인트가드로서의 기량과 활약상을 놓고 보면 그는 분명 이상민과 김승현 이전에 으뜸으로 꼽혔던 포인트가드다. 아니,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놓고 보면 이들과 맞대결을 펼쳐도 우위를 점하지 않을까. 강동희는 경기조율과 패스, 위기관리능력까지 포인트가드가 갖추고 있어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가드였다. 그리하여 붙은 별명이 '코트의 마법사'.

이렇게 각 포지션에서 최고로 꼽히던 선수들이 한데 어우러졌으니 기아자동차는 승승장구할 수밖에. 기아자동차는 허재-강동희라는 명콤비를 앞세워 농구대잔치 7연패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사실 스타플레이어의 만남이 반드시 좋은 성적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팬들은 실업은 물론 프로에서도 '무늬만 황금'이었던 콤비들의 와해를 어렵지 않게 접해왔다.

허재-강동희는 달랐다. 중앙대 재학시절부터 형, 동생으로 각별한 정을 쌓은 이들은 대학과 실업팀, 그리고 국가대표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수많은 영광을 누렸다.

그랬던 허재와 강동희는 1998년, 갑작스럽게 적이 됐다. 언제까지나 기아의 붉은색 유니폼을 함께 휘날릴 것만 같았던 이들은 프로가 출범한 이후 2년 만에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코트를 누벼야 했다.

허재-강동희라는 희대의 콤비가 이별에 이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길을 걷게 된 이후 이들은 어떤 행보를 걸어왔을까. 허재가 기아를 떠났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봤다.

# 황금콤비맞수가 되다

1997-1998시즌 부산 기아(현 울산 모비스)와 대전 현대(현 전주 KCC)가 펼친 챔피언결정전은 10년이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명승부다. 1997-1998시즌 챔피언결정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역시 허재.

허재는 경남 LG(현 창원 LG)와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오른 손등 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감독을 맡고 있던 최인선 감독은 "챔피언결정전에 뛰는 것은 무리"라며 허재가 없는 챔피언결정전을 구상했다.

하지만 허재는 손목에 부목을 대고 챔피언결정전에 출전하는 투혼을 펼쳤고, 맥도웰의 팔꿈치에 맞아 오른쪽 눈썹부위가 찢어졌음에도 코트를 지켰고, 기아는 절대 열세로 전망되던 챔피언결정전을 최종 7차전까지 끌고 가는 저력을 뽐낼 수 있었다.

부상 투혼을 펼친 덕분에 허재는 팀이 준우승에 머물렀음에도 챔피언결정전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강동희 역시 7경기 평균 39분 51초라는 살인적인 출전시간을 소화하며 허재의 뒤를 받쳤다.

그러나, 1997-1998시즌 챔피언결정전은 허재-강동희 콤비가 같은 유니폼을 입고 호흡을 맞춘 마지막 무대가 되고 말았다. 허재는 챔피언결정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98년 5월, 원주 나래(현 동부)로 트레이드됐다.

1997년부터 무성하게 떠돌던 '허재 트레이드설'이 현실이 된 것이다. 중앙대 시절부터 수많은 영광을 함께 일궈낸 '허재-강동희'가 '허재 vs 강동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허재를 손에 넣은 나래는 1998-1999시즌에 팀명을 삼보 엑써스로 변경, 그와 함께 도약을 다짐했다.

공교롭게도 허재는 삼보에서 뛴 첫 2시즌 동안 기아를 상대로 유독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적 이후 첫 시즌에 평균 17.1점 4.8리바운드에 2.1개의 3점슛(36.9%)을 기록했던 허재는 기아와의 5경기에서는 평균 19.4점 5리바운드 3개의 3점슛(38.5%)을 올렸다.

2번째 시즌에서는 시즌 기록과 기아전 기록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허재는 1999-2000시즌, 기아를 상대로 한 4경기에서 시즌 평균보다 5점 이상 높은 평균 22.4점을 기록했다. 3점슛 성공률은 10%에 가까운 증가 추세(기아전 43.5%, 시즌 기록 33.9%)를 보였다.

허재가 기아를 상대로 유독 좋은 성적을 남겼던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았을까. 친정팀이었기에 그의 승부욕이 더욱 불타오른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묻자 허재는 "내가 그랬었나?"라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는 회상을 뒤로하고 말을 이었다.

"특별히 기아라고 더욱 승부욕이 발동되거나 하는 것은 없었어. 그저 매 경기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 근데 내 머릿 속엔 내가 기아를 상대로 더 많은 점수를 올렸다는 것보다 더 많이 졌던 기억밖에 없어. 기아 멤버가 워낙 화려했잖아. (강)동희부터 (김)영만이까지."

당시 삼보는 허재를 영입한 것 외에 신인 드래프트와 적극적인 트레이드로 팀 전력을 개편했으나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강호 기아의 전력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1998-1999시즌 상대전적에서 1승 4패로 밀린 삼보는 강동희가 LG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5년간 27경기에서 12승 15패의 열세를 보였다. 이중 허재와 강동희가 맞붙은 16경기의 전적은 7승 9패, 삼보의 열세.

기아, 아니 강동희와의 맞대결에서 졌을 때의 기분에 대해 묻자 허재는 이렇게 말했다. "(강)동희한테 졌을 때 기분? 지는 경기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열 받는 거지 뭐."

허재가 강동희와의 맞대결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던 것은 강동희가 LG의 야전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다. 강동희는 2002년에 친정팀을 떠나 LG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 허재와 강동희는 플레이오프 포함, 총 17차례 맞대결을 펼쳤다. 12승 5패. 허재의 완승이었다. LG 유니폼을 입은 강동희와의 대결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허재는 "순전히 (김)주성이 덕분에 복수할 수 있었던거야"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이에 반해 강동희는 허재가 기아를 떠난 이후 첫 2시즌간 삼보를 상대로 시즌 평균에 못 미치는 득점을 남겼다. 1998-1999시즌 평균 15.9점 2.2개의 3점슛(38.6%)을 기록했던 강동희의 해당 시즌 삼보전 기록은 4경기 평균 10.8점 0.8개의 3점슛(21.4%). 어시스트는 평균 0.4개 가량 증가한 수치를 보였지만 득점 하락폭이 더욱 뚜렷했다.

하지만 강동희는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허재가 1998-1999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 머문 것에 반해 강동희는 허재가 떠난 기아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다시 한 번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밟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강동희와 허재는 다른 팀에 있을 때도 항상 '봄의 축제'에 함께 초대 받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할 때는 함께 시즌을 빨리 마무리했다. 이들은 2000-2001시즌부터 2001-2002시즌까지 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문턱을 밟지 못했다.

강동희와 허재의 현역시절 맞대결 중 가장 큰 화제를 일으켰던 장면은 단연 2002-2003시즌 플레이오프다. 오성식과 맞트레이드 돼 LG에서 뛰게 된 강동희는 단번에 팀을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노쇠화 논란을 잠재웠다. 38세에 MVP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LG는 김주성을 앞세운 TG삼보와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최종 5차전까지 가는 혈투였다. 테런스 블랙, 데이비드 잭슨의 득점 대결도 볼만했지만 백미는 강동희와 허재의 맞대결이었다.

LG는 홈에서 열린 2경기에서 모두 패해 벼랑 끝에 몰렸지만 강동희의 활약에 힘입어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 갔다. 강동희는 3차전에서 3점슛 3개 포함, 13점 7어시스트 4스틸로 팀의 연패 사슬을 끊은데 이어 4차전에서는 연장 종료 5초전 결승 득점을 성공시키며 허재를 울렸다.

하지만 강동희와 LG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LG는 5차전에서 전반을 15점 앞선 채 마쳐 2000-2001시즌 이후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눈앞에 뒀지만 후반 들어 폭발한 TG삼보의 화력에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잭슨이 후반에만 19점을 몰아넣은 가운데 허재도 2개의 3점슛을 터뜨리며 강동희와의 맞대결의 최종 승자가 됐다.

그렇다면 강동희는 허재와의 맞대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라며 천천히 허재와의 맞대결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어린 시절부터 허재형은 나에게 우상이었다. 허재형은 뛰어넘을 수 없는 산과도 같았다. 맞대결? 나는 오히려 내가 진 기억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하하."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허재와 강동희 모두 현역시절 맞대결을 회상해달라는 질문에 약속이나 한 듯 "진 기억밖에 없다"는 말을 꺼냈다. 맞대결 전적은 동률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허재는 강동희와의 맞대결에서 19승 14패의 우위를 보였다.

기아에서 허재-강동희를 지도했던 최인선 감독에게서 허재와 강동희가 "진 기억밖에 없다"는 말을 동시에 꺼냈던 것에 대한 해답, 그리고 이들이 한국농구 최고의 스타로 오랜 시간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최인선 감독은 허재와 강동희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허재만한 승부욕을 갖춘 선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몸 관리에도 충실했다. 강동희는 허재에 비해 유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코트에 나설 때만큼은 또 다른 선수가 됐다. 범접할 수 없었던 특유의 승부근성이 그들을 한국 최고의 농구스타로 이끈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 정장 입고 다시 만난

황금콤비

허재와 강동희는 끝내 선수로서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대결을 펼치는데 실패했다. 허재는 "원래 2002년 우승하고 곧바로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구단 관계자의 설득에 1년을 더 뛰게 된 것이다"라고 2003-2004시즌에도 현역으로 활약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허재와 강동희가 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맞대결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졌다. 하지만 이들이 2003-2004시즌에 맞대결을 펼친 것은 정규리그 6경기에 그쳤다.

양 팀 모두 2003-2004시즌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반대편 시드에 배정된 탓에 챔피언결정전 티켓을 따내야만 또 한 번의 맞대결이 가능했다. 허재가 속한 TG삼보는 4강 플레이오프에서 인천 전자랜드에 3연승, 어렵지 않게 챔피언결정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LG는 또 다시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밟지 못했다. LG는 4강 플레이오프에서 정규리그 준우승팀 KCC에 3경기를 내리 패해 쓸쓸히 플레이오프를 마감했다. 허재와 강동희가 유니폼을 입고 맞대결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자연스럽게 무산됐다. 이들은 2003-2004시즌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11년 4월. 허재와 강동희가 선수로서 못 다 이룬 결승 격돌이라는 빅매치를 성사시켰다. 2005년부터 KCC의 지휘봉을 잡게 된 허재 감독은 2008-2009시즌부터 내리 3년 연속으로 팀을 챔피언결정전에 올려놓았고, 2009년에 전창진 감독의 뒤를 이어 동부의 사령탑으로 임명된 강동희 감독은 부임 2년 만에 팀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끌었다.

사연 많은 스타 감독끼리의 맞대결인 덕분일까. 이번 챔피언결정전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감독들의 대결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져있다. "당분간 정을 끊겠다"며 시리즈에 앞서 뜨거운 신경전을 벌인 허재 감독과 강동희 감독은 1번씩 승리를 주고 받는 접전을 펼치고 있다. 양 팀의 대결은 최소 6차전 이후나 돼야 결판이 나게 됐다. KCC의 압도적인 우세가 점쳐졌던 시리즈 전망과 비교하면 분명 흥미로운 결과다.

또 한 가지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다. 오는 6월 열리는 2011 동아시아대회 대표팀의 지휘봉은 2010-2011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팀 감독이 맡을 것이 유력하다. 허재 감독, 또는 강동희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고 국위선양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것.

강동희 감독은 이 부분에 대해 허재 감독과 나눴던 은밀한 제안을 공개했다. 우승을 하는 쪽이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면 지는 쪽은 코치로 함께 동아시아대회에 참가하자고 한 것이 현역시절 황금콤비로 불렸던 허재 감독과 강동희 감독이 나눈 유쾌한 상상.

그렇다면, 동부가 우승을 하게 된다면? 1년 후배인 강동희 감독이 감독을, 선배인 허재 감독이 코치가 되는 걸까? 강동희 감독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제가 허재형을 어떻게 코치로 쓰겠어요. 하하. 하지만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던 허재형과 이렇게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니…. 누가 우승을 하던 우리는 상대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거예요. 언제 또 이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싶네요. 결과를 떠나 우상 허재형과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는 지금이 너무 행복합니다."

-원주 동부 강동희 감독

# 사진 문복주 기자, KBL Photoro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1-04-25 최창환 기자( doublec@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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