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7) 반공포로 문제

백선엽.유광종 입력 2011. 1. 24. 01:57 수정 2011. 1. 2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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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백선엽.유광종]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1950년 초 경무대에서 연못 속의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이 대통령 부부가 키우던 애완견의 모습도 보인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건강과 함께 대외문서 등을 직접 챙기는 비서 역할도 했다. 민감한 현안이 아닌 경우에는 대통령과 함께 외부 인사와의 면담에도 자주 참석했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1953년 5월은 큰 위기였다. 한국과 미국이 휴전협정을 두고 빚은 갈등의 양상이 파국(破局)의 조짐으로도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휴전협정 조인의 전제로 한국이 요구했던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관해 미국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위기 국면은 풀어지고 있었다.

 내가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방미를 했고,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을 만나 상호방위조약에 관해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언질을 받았다는 점은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다. 한국과 미국은 그로써 높고도 거대한 준령(峻嶺) 하나를 넘어선 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의중을 정확히 설명할 방법은 없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53년 6월 초의 아주 무거웠던 경무대의 분위기는 그 점을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휴전협정의 막바지 걸림돌은 포로 교환에 관한 사안이었다. 판문점의 유엔 측과 공산 측 대표는 휴전이 성립한 후 일정 기간 동안 각자의 포로를 교환하자는 데 합의한 상태였다. 그 시점이 53년 6월 8일이었다.

 공산 측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휴전을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유엔 측이 낸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의 거취 결정 제안'을 수용했다. 유엔 측은 휴전회담 초반부터 줄곧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원칙으로 삼았다.

 공산 측은 그에 줄곧 반대해 오다 급기야 53년 들어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결국은 송환을 원하는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중립국 중심의 '송환 거부 포로 관리위원회'를 구성해 처리키로 양측이 합의했다. 그러나 위원회 활동에 따라 반공(反共) 성향의 포로들이 설득을 당할 위험성이 그 안에는 담겨 있었다. 노련한 정략가(政略家)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바로 석방해 자유의 품으로 안아 들여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판문점에서 양측이 이런 타협안을 내놓자 대한민국 정부는 바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합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은 즉각 석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통령의 강수(强手)는 또 이어졌다. 휴전회담에 참석한 한국 대표 최덕신 소장을 판문점에서 철수시키는 조치였다.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이 대통령의 입장은 옳았다. 중립국이 관리하는 위원회가 송환 거부 포로들을 다룬다고는 했지만, 공산 측의 집요한 설득이 개입할 소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포로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의 사람들이었다.

마크 클라크(1896~1984)

 그들을 대상으로 공산 측이 감언이설(甘言利說) 또는 위협적인 언사 등으로 압력을 가할 경우 포로들은 원래의 송환 거부 의지를 꺾을 가능성이 충분했던 것이다. 유엔과 공산 측은 나름의 합의에 도달했으나 이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의 입장은 완강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대통령은 단지 포로 문제에만 국한해 당시의 상황을 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좀 더 큰 시각에서 코앞에 닥친 휴전의 문제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내 짐작인데, 이 대통령은 스스로 결코 원치 않는 휴전을 유엔과 공산 측이 이끄는 방식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아이젠하워로부터 전해진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논의하자'는 메시지는 아직 구체적인 결과가 없는 상태였다.

 그로서는 더 확실한 결과를 받아 든 뒤 휴전을 현실로 받아들일 생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경무대는 그렇게 현실로 닥친 휴전을 다시 뒤집기에 골몰하는 분위기였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그때의 경무대 분위기를 이런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 대통령을 찾아갔던 경무대에는 청우계(晴雨計)가 늘 있었다고 했다. 바로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그가 방문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과 함께 있는 경우라면 그날은 '맑음'이었다고 했다. 우호적인 분위기, 다툼의 소지가 없는 주제를 다루는 날이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늘 대통령과 자신의 대화에 동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사가 보이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는 '흐림'이었다. 아주 까다로운 주제를 논의하거나, 이 대통령이 반대하는 사안을 토의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예 응접실에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판문점에서 유엔과 공산 측의 막바지 포로 송환 협상이 합의를 이루던 시점인 53년 6월 초의 경무대에서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게 마크 클라크 장군의 회고다. 그는 "한복을 우아하게 입은 채 손수 차와 과자를 접대하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 무렵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과 나 사이에 휴전을 둘러싼 의견 대립이 심해져 갈수록 나는 대통령의 부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없어져 갔다"고 적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마크 클라크 장군은 그 당시의 심경을 "매우 난처했다"고 털어놓고 있다. 그가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의 이 대통령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반공 투사였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협상안으로 그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심사가 매우 불편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나타나기 전 그가 먼저 경무대 응접실에 들어설 때 자신을 맞아주는 존재는 이 대통령이 키우던 애완용 강아지였다고 했다. "(강아지는) 가장 난처했던 나를 자신의 동료라고 그렇게 반겨주었는지 모른다"고 자신의 심경을 적었다. 이어 그를 면담하기 위해 나타난 이승만 대통령의 눈빛에서 클라크는 "절망과 저항이 엇갈리는 듯한 대통령의 심정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경무대의 어두운 분위기는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 kjyoojoongang.co.kr >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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