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담다, 가족을 말하다..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 집' 展 사진 주인공 전윤미씨

2010. 12. 2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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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곱게 차려 입은 한 중년 관객이 지난 23일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전시관에서 흑백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갓난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젖을 빨고 있는 사진이었다. 회상에 잠긴 듯했다. 그러곤 이내 눈물 흘렸다.

"고생하셨던 부모님, 제 어린 시절, 또 지금 자라나는 제 딸이 동시에 생각 나 눈물을 참을 수 없네요."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 집' 사진전. 1971년 첫 번째, 78년 두 번째 사진전 이후 32년 만에 다시 열렸다. 아마추어 사진작가 전몽각(1931∼2006·전 성균관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사진에 담긴 따뜻한 숨결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그는 큰딸 윤미씨의 출생(1964년)부터 결혼(1989년)까지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27일 사진 속 주인공 윤미씨와 어렵게 전화로 연결됐다. 윤미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얼바인에서 1남 1녀의 어머니로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가족 사랑을 전했다.

새 생명의 탄생, 사진의 시작

초보 아빠 전몽각. 카메라를 든 채 태어난 지 3일 된 윤미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서울 마포 임대아파트 조그만 문 사이로 이불에 싸인 아기가 들어오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윤미의 첫 사진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내의만 입고 있는 모습을 찍으려 하시더라고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도망을 쳤죠. 하지만 아빠는 끝까지 쫓아오셔서 저를 잡고 사진을 찍으셨어요."

오랜만에 옛 생각에 빠져든 것 같았다.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 울었을 때 달래주기는커녕 그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윤미씨는 크게 웃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저도 사진 찍는 걸 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면 '어쩜 꼬마가 저렇게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을까'하고 스스로 놀라요."

아껴둔 말이 많은 듯 이야기보따리를 꺼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가족 모두 북한산에 올랐죠. 산 정상에 바위가 있었는데 아빠가 굳이 오르자고 하시지 않겠어요. 저희 3남매의 표정이 어땠겠어요. 순식간에 사색이 됐죠. 그런데 아빠는 무서워하는 저희 표정이 재밌다며 오히려 바위 반대쪽으로 가셔서 저희를 찍으셨어요."

바위 반대쪽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 건 뒤늦게였다.

"실족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던 곳이었음에도 아빤 두렵지도 않으셨나 봐요. 저희 모습을 담는 게 최우선이셨던 거죠."

사춘기가 되자 카메라 앞에 서는 걸 꺼리게 됐다. "아빠 역시 '우리 윤미 중학생 된 뒤부터는 사진 수가 줄었어'라고 장난스럽게 볼멘소리를 하시기도 했죠."

고집불통 우리 아빠

전몽각은 71년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첫 사진전에 얽힌 일화도 웃음을 자아냈다.

"처음 아빠가 제 사진을 찍을 때 엄마는 '그냥 찍나보다' 하셨대요. 갑자기 사진전을 연다고 하셨다는군요. 엄마가 '사진전 거리나 되겠어요'라고 묻자 당연히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대요."

못 나온 사진, 창피한 모습이 드러난 사진은 제발 빼달라는 가족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막내 동생이 자장면을 먹다 자장을 입에 잔뜩 묻힌 적이 있어요. 아빠는 카메라를 들이대셨죠. 너무 재밌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선해요. 그런데 그 사진을 전시하신 거예요. 동생 친구들이 전시회에 와서 사진을 보고 무척이나 놀렸답니다. 얼마나 창피해하던지요."

윤미씨가 결혼식을 올린 날, 전몽각은 딸 사진을 그만 찍기로 결심했다. 수없이 셔터를 눌러온 그의 손가락도 그제야 조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90년에 발간된 '윤미네 집'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이었다.

"결혼 두 달 만에 미국에 왔어요. 적응하는 데 꽤 애를 먹었어요. 1년이 지나 한참 가족 생각이 날 무렵에 사진집을 받았어요. 아빠의 오랜 꿈인 건 알았지만 사진집으로 만들어내실 줄 몰랐거든요. 감격에 차 많이 울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그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가족끼리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웃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했다. "당시 아빠랑 잠옷차림으로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이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엄마랑 3남매 사진은 많은데 아빠가 나온 사진은 드물거든요. 그 사진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남편의 마지막 선물

이날 미술관에서 만난 윤미씨 모친 이문강(70)씨도 남편의 가족 사랑을 회상했다.

"결혼 후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이 이어졌죠. 국립건설연구소에 다니던 남편 월급으로는 생활비가 모자랐어요. 저도 그때 철없이 직장을 관두었고요. 살아갈수록 남편이 찍어 놓은 사진들 하나하나가 큰 힘이 되더군요." 남편은 항상 자신을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했다고 기억했다.

"2002년 7월말이었어요. 하루는 남편이 한강둔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컨디션이 영 안 좋아 보였어요. 서울대병원에 가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췌장암 진단이 나왔습니다. 길어야 6개월이라는 의사의 말, 청천벽력과 같았죠."

그런 말을 듣고도 전몽각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씨는 의아했다.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부터 오히려 더 바쁘게 지내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였을까요. 몸도 안 좋으신 분이 급하게 뭘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게 초판 '윤미네 집' 사진에 제 사진을 추가해 만든 증보판 '마이 와이프'였어요."

'마이 와이프'를 만드는 동안 전몽각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작업을 해 나갔다. 3개월, 6개월, 1년이 지나도 건강은 악화되지 않았다.

"가족의 기도가 간절했고 치료도 잘 받으셨어요. 사진에 대한 열정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겠죠. 주치의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죠."

아버지의 쾌유를 위해 윤미씨도 멀리서 기도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인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그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진을 좀 더 찍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기도가 통해서였을까. 6개월밖에 못 산다던 전몽각은 4년이나 사진을 더 찍은 뒤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가족의 소중함, 공유했으면

모녀는 남편과 아버지를 '참 자상하셨던 분'으로 기억했다. 남편의 기억을 더듬던 아내의 눈이 촉촉해졌다.

"결혼기념일이나 제 생일은 한번도 챙기지 않으시던 분이 돌아가시기 전 '마이 와이프'를 마지막 선물로 주시더군요. 사진과 글에서 남편의 사랑이 느껴져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윤미씨 역시 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저희 가족은 특별하고도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어요. 아버지께 항상 감사하죠. 그런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가 없었으면 아빠가 사진작가를 하시기 어려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60∼70년대, 아버지의 취미 활동을 내조한 어머니 역시 존경스럽다고 했다.

이씨는 남편의 사진이 지금 세대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걸 감사히 여겼다.

통화 막바지, 윤미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원하는 사진 마음껏 찍고 계시죠? 우리 다시 만나면 또 찍어 주셔야 해요."

■ 전몽각은 1972년부터 96년까지 성균관대 토목공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큰딸 윤미씨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71년 사진전을 통해 처음 사진을 공개했다. 90년에는 사진집 '윤미네 집'을 출간했다. 생활사진작가라는 사진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사진계의 평이다. 사진전은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2011년 2월19일까지 열린다.

글 조국현 기자·사진 서영희 기자 jo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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