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은..>, 왜 23가지냐고?"

2010. 12. 24. 15:1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오승주 기자]

21일 합정동 에뚜와 카페에서 장하준 교수와 블로거(리뷰어)의 조촐한 미팅이 있었다. 부키 출판사가 주최했고 경향신문 윤병선 논설위원이 사회를 봤다. 간담회 내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 오승주

21일 오후 8시 합정동 카페 에뚜와에서 '장하준과의 소박한 만남'이라 이름 붙여진 행사가 열렸다. 장하준 교수가 쓴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출고 20만부(34쇄) 돌파 기념으로 부키출판사가 마련한 자리다.

행사에 초대받은 손님은 장하준 교수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린 블로거들이다. 부키출판사 직원들이 웹 서핑을 통해 블로거를 발굴해 초청했는데 방명록에 글을 남기거나 메일을 보내는 식으로 해서 이날 자리한 블로거가 20명 남짓이었다.

네이버, 예스24, 알라딘, 티스토리 등 다양한 소속(?)의 블로거들이라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야기가 오갈수록 서로 눈빛으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장하준 교수는 독감으로 몸 상태가 안 좋았지만 블로거들과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신이 났는지 모든 블로거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라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공식행사가 30분 정도 늘어났다.

얼마 전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와 블로거 미팅 모두 참여한 나 역시 그런 평가에 동감했다. 심도 있는 질문에서부터 분위기 살리기 용의 센스있는 질문까지, 한 마디로 장하준 교수를 '들었다 놨다'한 자리였다.

장하준 교수와 친하다는 이유로 이번 미팅에도 < 경향신문 > 유병선 논설위원이 사회를 봤다. 예능식으로 표현하자면 '주워먹기' 실력이 출중해 재미있으면서도 매끄러운 진행을 보이는 윤종신에 비할 만했다. 당시 있었던 대화를 문답식으로 편안하게 재구성해보았다.

"문화와 경제 얘기는 못 담아... 반기문 총장보다는 영어발음 좋다"

- 왜 경제학 교수가 되었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어서(파스칼의 < 팡세 > 라는 책을 보면 "교수들이란 30분 발언 기회를 주면 다 사용하고도 10분만 더 달라며 말을 놓지 않는다"고 했는데, 장 교수는 파스칼이 정의한 교수에 딱 맞는 유형이다)."

- 왜 하필 '23가지'인가?

"한 25가지 정도는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25란 숫자는 너무 뻔하고 짝수는 되도록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21은 20에 너무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23'이 선택되었다(이 대답을 들었을 때 블로거들은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고, 더러는 한숨을 쉬기도 했다)."

- 23가지에서 탈락한 선수들이 있을 것 같은데…

"문화와 경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서양 사람들이 자꾸 하는 말 중에 "아시아적 가치는 독재"라는 게 있는데, 자기네는 언제 민주주의 했나? 미국은 1960년대까지 대부분 투표권을 박탈했다. 투표권이 법적으로 보장됐어도 남부의 어떤 주에서는 이른바 '문맹테스트'란 걸 해서 백인에게는 이름 써봐라 하고 '합격', 흑인에게는 성경의 어려운 구절을 들이대고 '불합격' 이런 유치한 짓을 많이 했다. 스위스는 1971년에야 투표권이 보편화됐지만, 한 개 주는 1991년이 되어서야 투표권을 허용했다. 서양인들 머릿속에 있는 동양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이 담겨있다. 그 밖에도 들어왔다 나갔다 한 게 꽤 있다."

-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악필에다가 영어 발음이 엉망이라는 세간의 평이 사실인가?

"말도 안 되는 루머다. 내 주변에 자기가 쓴 글을 못 읽는 사람을 봤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니 첫째 악필은 아니다. 얼마 전 반기문 총장이 UN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 영어 발음은 반기문 총장보다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 평은 모두 루머다."

- 옛날에 장학퀴즈에 출연한 사실을 알고 있다. 사과파이를 좋아하고 음악 디스크를 200장이나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지금도 그 취향 변함 없나?

"20~30년도 더 된 일인데, 어떻게 기억해낼 수가 있나. 정말 존경스럽다. 집안이 고급공무원 출신이라 유복했는데 어머니가 미국 선교사 여사분에게 영어를 배우러 다니면서 사과파이를 얻어 왔다. 그때 맛 본 계피맛을 잊을 수가 없다. 음악은 록큰롤보다는 클래식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좋기만 하다면 장르는 안 가리는 편이다. 왼쪽 맑스에서 오른쪽 하이에크까지 다 읽었듯이."

한·미FTA, "권투도 체급 분류 엄격, 유독 자유무역만 무제한급 강요"

- 솔직히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자유주의가 좀 모자라 보이는 이론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나?

"아르헨테나가 신자유주의를 살렸다고 할 수 있다. 영국 보수당 대처 수상은 재선될 상황이 아니었다. 노동당이 실업자를 100만 명이나 양산했다고 비난하면서 당선돼놓고 몇 년 뒤 300만 명의 실업자를 만들어 낸 수상에게 누가 투표하겠나? 하지만 그때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포클랜드 섬- 혹은 말비나스 섬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한 전쟁.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이 벌어졌다. 애국심 바람이 불었고 대처는 재선에 성공한다. 그때 만약 집권 못했더라면 신자유주의는 뜨지 못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론이 득세하는 원리가 있다. 첫째, 돈 많은 기업에게 유리한 이론이기 때문에 후원을 많이 받는다. 생계형 지식인들이 많이 생겨난다. 이것이 순환된다. 둘째, IMF 총재며 수석 이코노미스트 어쩌고 하는 완장을 찬 사람들이 신문이나 국제 회의에서 강조하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인다."

- 다른 책은 안 그런데 경제학책만 읽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팔랑귀가 된다. 좌든 우든 가리지 않고 그런 편인데, 속지 않고 경제학을 접할 비법이 있나?

"좌우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쉽게 쓰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일부러 그러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어떤 경제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자기 논리를 이해하면 오히려 걱정한다더라. '내가 잘못 가르쳤나?' 하고.(웃음) 어느 학문이나 학자들이 자꾸 진입장벽을 만드는 못된 버릇이 있다. 어릴 때 병원가면 의사 선생님이 엄숙한 표정으로 처방전에 멋들어지게 영어로 사인하는 모습 한 번쯤 봤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스피린 한 알' 뭐 이런 거였다.

경제학도 이런 게 많다. 속지 않는 방법은 역사적인 팩트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컨대 싱가포르이 자유무역, 개방 정책 펴서 발전된 거라고 많이들 속이지만 싱가포르은 모든 토지 국유화에 85%의 주택을 공사가 보급하고 강제저축을 정책으로 쓰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다. 미국 역시 자유무역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지만 19세기 미국의 관세율과 보호무역이 가장 악명 높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말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교양으로 알고 있으면 누가 장난치는지 알 수 있다."

- 까놓고 말해서 우리나라 국가경쟁력 수준이면 한·미 FTA해도 되는 거 아닌가?

"권투를 예로 들어보겠다. 권투는 체급이 엄청 세분화돼 있다. 플라이급, 밴터급이 1~1.5kg 차이가 난다(권투 선수들이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팬티를 자주 벗는 이유이기도 하다). 2kg만 차이가 나도 게임 자체가 성립 못한다. 스포츠 경기 하나를 하려고 해도 이렇게 엄격한데, 유독 자유무역만 무제한급을 강요한다. 일률적인 자유무역이나 보호무역은 답이 될 수 없다. 차등적인 보호무역이 필요하다."

"선진국들 한 짓 보면, 원자폭탄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 들기도"

- 신자유주의의 판을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공이 개발경제학이다 보니 선진국들이 한 짓들을 보게 된다. 가끔 부아가 치밀어 이 세상을 원자폭탄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영국에 유명한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 런던에 있는 국립 미술관. 1897년에 개관)란 곳이 있는데 '테이트 & 라일'이라는 회사는 노예 잡고 원주민 학살하기로 유명하다. 홍콩상하이뱅크(HSBC)는 어떤가? 영국정부가 아편전쟁을 할 때 돈을 댄 은행이다. 아편전쟁이 뭔가? '메이드 인 영국' 찍고 뻔뻔하게 들어오는 아편을 중국 공무원이 반려했다고 일으킨 전쟁 아닌가? 이게 지금으로 보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열 받으면 세상 바뀌기 힘들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지금 보면 세상이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지만, 200년 전 노예폐지, 50년 전 여성 투표권 허용 주장하면 미쳤다고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요즘 '복지'가 대세인데, 이렇게 빨리 복지담론이 뜬 것을 보고 난 진정 깜짝놀랐다. 안 바뀔 것 같지만 결국 바뀐다고 믿는다. 하지만 개인기로는 한계가 있다. 조직이 잘 하는 것만 못하다.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과 행동을 조직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 그들은 (신자유주의자, 거대 기업, 관료 등) 틈만 나면 "정치논리를 배제하자"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궁극적으로 정치와 경제는 분리하기 어렵다.그래서 정치경제학이다. 한 마디로 시장이 정치의 산물이고, 경제가 정치다. 경제정책, 시장경제에서 정치적 가치판단을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경제학의 기원을 따라 가면 분명해지는데 리카르도, 애덤 스미스는 모두 정치경제학자다. 특히 애덤 스미스는 < 국부론 > 외에 < 도덕감성론 > 을 썼는데 이는 도덕 철학책이다. 즉 경제학은 도덕철학의 일부로서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 신자유주의와의 논리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한수 부탁드린다

"이른바 주류 경제학이 상정하는 인간은 '이기심만으로 가득찬 존재'다. 만약 인간이 극단적으로 고단한 처지에 놓였다면 그 이기적인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그들이 설정한 인간은 틀렸다는 말이 된다.

논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 장인어른이 이것을 참 잘한다. 하루는 장인이 방에서 연양갱을 맛나게 먹고 있었는데 손자가 조금만 달라고 해도 양보하지 않으셨다. 뿔난 녀석이 엄마한테 이르자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가서 내가 좋아요 양갱이 좋아요 하고 물어봐라' 하고 조언을 해줬다. 녀석이 할아버지한테 가서 그대로 일렀더니 할아버지 답이 가관이다. "사람 중에는 너, 과자 중에는 양갱" 하면서 혼자 다 먹어 버리는 거다."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다. '영업비밀'이란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동안 언론에 의해 그려진 경제학자 장하준이 무장해제한 모습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평가하자면 그는 '예능감 있는 경제학자'였다. 미팅 간다고 자랑질했을 때 지인들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둘 중 하나 꼭 하게 만들어라"고 지령을 내렸는데, 그 말은 차마 못했다. 이 점이 후회된다. 바짓가랑이라도 잡아볼 걸.

장하준과 블로거의 소박한 미팅이 끝나고 간단한 기념촬영. 저마다 이야기를 두둑하게 챙겨가 므흣한 표정들이다

ⓒ 블로거 어디쉬

[☞ 오마이 블로그]

[☞ 오마이뉴스E 바로가기]

- Copyrights ⓒ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