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김영삼식 북풍 접고 노태우식 훈풍 따라야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0. 6. 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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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만이다.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기 직전까지 갔던 1994년 1차 핵위기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에 '진지한' 전쟁 공포가 엄습했다. 금융시장이 출렁이고, 예비군 징집령이 떨어졌다는 괴문자가 나돌아 병무청에 문의전화가 폭주한다. 대북 심리전 방송 재개니 개성공단 철수 검토니 하는 험악한 말이 오가며 대중이 체감하는 위기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위기관리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북한의 도발'은 핵심 변수가 아니다. 보수 정권 때도, 진보·개혁 정권 때도 '북한 도발'은 늘 있었지만, 그를 관리하는 남측 정부의 태도가 위기의 수준을 결정했다.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 연평해전 때도, 2005년 북한 핵실험 때도 대중의 전면전 공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북한에 대해 어떤 정책수단도 갖지 못한 채 빌 클린턴의 북폭 계획을 대북 특사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멈춰주기만을 기다려야 했고, 이명박 정부 역시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대응하는' 긴장 고조의 악순환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다. 입버릇처럼 "안보의식이 무너졌다"라고 외치는 정권일수록 안보의 핵심인 위기관리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청와대 제공 5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사태와 관련한 담화문을 발표하기 위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들어서고 있다.

보수 정권 대북정책이야말로 '포퓰리즘'

위기관리 능력 부재는 남북 간 신뢰와 북한 제어 수단이 동시에 무너진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신뢰가 없으니 강경책만 주고받는 악순환에 빠지고, 북한을 제어할 정책수단이 없으니 군사조처만 언급된다. 특히 "손에 카드가 없다"라는 지적은 뼈아프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지난 10여 년간 쌓아올린 북한과의 호혜 관계가 천안함 침몰 이전부터 사실상 붕괴된 상태다.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 단절에서 손해를 볼 게 없는 상황, 남한이 북한을 비군사적으로 압박할 수단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북 강경책의 근본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북한은 잃을 것이 없는 반면, 남한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극단적 비대칭 상황을 기본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긴장이 더 고조되면 중국조차 북한을 통제할 수 없다. 북한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요동치는 금융시장에 몸살을 앓을 일도 없다. 이런 북한을 두고, 밀어붙이면 무릎을 꿇을 것이라 믿는 강경파의 대북관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라고 말했다.

보수 언론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상주의적이라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보수 정권의 대북정책이야말로 '극단적 비대칭'이라는 현실에 발딛지 않고 보수적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얘기다. 노태우·김영삼 정부에 걸쳐 청와대에서 일한 보수 진영의 한 원로도 "압박으로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난 부시 정권 8년 동안 충분히 증명된 사실 아니냐"라고 거들었다.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금융시장에서는 10년 가까이 듣기 힘들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이명박 대통령(MB)은 지난 5월24일 대국민 담화에서 "북한 선박은 우리 해역의 어떠한 해상교통로도 이용할 수 없다"라며 남북 해운합의서 파기를 시사한 바 있는데, 이는 오히려 남한에 타격이 커 남북 간 '비대칭'이 얼마나 극명한지를 증명하는 사례가 될 전망이다. 합의서가 발효된 2005년 이후 지난 5년간 남한 선박의 북한 해역 통과는 3만2189회였던 반면 북한 선박의 남한 해역 통과는 2066회였다고 통일부는 밝혔다(편도 기준).

MB는 2008년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노태우 정부의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남북 교류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부정하고 보수 정권의 대북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이라는 분석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연합뉴스 1994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사진 왼쪽)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폭격을 심각히 검토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사진 오른쪽)은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켜봤거나 직접 수행했던 이들은 이런 분석까지도 과대평가라고 고개를 젓는다. 대북정책에 한해서는 '보수 정권 대 진보 정권'이라는 대립구도 자체가 허구라는 것이다. 참여정부 위기관리팀의 핵심이었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노태우 정부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대북정책의 '정통'이 있다.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그로부터의 일탈이다"라고 규정했다. 대중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분석이다. 노태우 정부는 기본적으로 대북 포용정책 노선을 추구한 정부였고, 이런 기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다. 그 결과 노태우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를, 김대중 정부는 6·15 선언을, 노무현 정부는 10·4 선언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반면 대북 압박정책을 구사한 김영삼 정부는 1994년 미국의 북한 폭격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고, 이명박 정부는 현재 출구가 보이지 않는 '치킨 게임'에 돌입했다.

"대북정책, YS와 MB가 정통에서 일탈한 것"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북 포용정책을 주도해온 핵심 인사다. 임 전 장관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 얘기부터 꺼냈다. "7·7 선언은 북한과의 직교역, 이산가족 왕래, 외교적 상호협조 등을 처음 선언한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남북 간에 교류의 물꼬가 트였다. 전면 교류 차단을 선언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은 남북관계를 7·7 선언 이전으로 되돌리자는 것이다." 1988년 7·7 선언, 1989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발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이어지는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은 일관된 포용정책이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이 주장하는 '보수 정권=대북 압박정책'이라는 등식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1992년 대선 때부터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다. 임 전 장관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신한국당 대선 주자가 된 김영삼 후보는 대선 전략을 '북풍'으로 잡는다. 상대인 김대중 후보의 '친북'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용공음해 의혹이 끊이지 않던 '이선실 간첩단 사건'도 이때 터졌다. 반면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기 전 남북관계를 진전시켰다는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려 했다. 당시 남북회담을 주도한 임 전 장관은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으나 김영삼 후보 캠프에서 극렬 반대했다. '이산가족 상봉이 되면 김대중이 이긴다'는 거였다"라고 회고했다. 결국 '대통령 훈령 조작사건'과 같은 스캔들까지 일어나며 상봉 협상은 결렬됐다. 이후 김영삼 정부는 한완상 통일부총리 정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외교안보 참모그룹을 강경파로 가득 채우기에 이른다. 1993년 한 부총리가 물러난 후, 김영삼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1994년 전쟁 직전의 위기로까지 치닫는 상황을 전혀 다루지 못했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 그룹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으며, 남한이 할 일은 북한을 압박해 붕괴를 촉진하는 것이라는 붕괴임박론자가 하나다. 다른 한쪽에는 북한 붕괴가 현실적이지 않으며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보는 그룹이 있다.

이 두 그룹은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해법도 달리 본다. 붕괴론자는 북한 핵문제가 풀리고 나서야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정신은 김영삼 대통령의 "핵을 가진 상대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라던 발언이나, 일단 핵을 포기하고 나면 북한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겠다는 MB의 '비핵·개방 3000'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반면 점진변화론자는 북한 핵문제는 근본적으로 미국과 북한 사이 적대관계의 산물이므로, 남한이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한반도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고, 그를 자산으로 미국과 북한 양쪽을 견인해내야 한다고 본다. 6자회담은 이런 전략에 기초한 테이블이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을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 차원에서 사고했다.

보수 정권, '포용의 북방한계선'에 걸릴 운명

노태우 정부 이후 20여 년간의 대북정책을 보면, 이 두 그룹은 비교우위를 보이는 분야가 전혀 다르다. 붕괴론자가 주도권을 잡은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 간 긴장은 극도로 고조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노태우 정부는 이전 정부에 견줘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며 긴장 수위를 낮췄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대중이 차이를 체감할 만큼 긴장 수위가 낮아졌다. '북한이라는 위험물'을 관리하는 안보 문제에서 어느 쪽이 비교우위가 있는지는 뚜렷해 보인다.

반면 국내 정치에서는 대체로 강경파 그룹이 승리를 거두었다. 오랜 남북 대결구도를 경험해온 남한에서 북한에 굴복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포용정책은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에게 별 인기가 없었다. 정세현 전 장관은 "참여정부 때도 정무라인에서는 국민 여론이 안 좋으니 대북 강경책을 택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강경책은 늘 국가적 손해가 더 큰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보수 정당 후보라면 어김없이 대북 강경론을 들고 나와 선거를 치르고 정부를 운영해야 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2007년 대선에서는 심지어 MB의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전향적"이라며 이회창 후보가 독자 출마를 선언해 보수층의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보수 정당이 정권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북 포용의 북방한계선'이 존재하고, 그것을 넘었다가는 언제든 보수층의 반발을 각오해야 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탄생해 남북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강했고, 권위주의 정치문화가 남아 있어 정책적 자율성이 컸던 노태우 정부는 이 공식의 드물지만 결정적인 예외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보수화 경향 속에서 태어나고 강경파 외교안보팀에 둘러싸인 데다가 지방선거마저 코앞에 둔 이명박 정부에게 이런 '예외적인 경로'는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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