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북한-미국 개입설'은 사실무근"

2010. 5. 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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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보안사 소속으로 '특전사 보안반장'으로 있었는데, 5.18이 일어나기 전후에 특전사의 움직임은 어땠나?

"가장 특이한 점은 12?12가 끝난 다음 장세동이 특전사 작전참모로 배속받은 것이다. 12·12 주역이 특전사 작전참모로 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특전사령관으로 온 정호용은 12·12 주역이 아니다. 12·12 주역들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죽고 나서 바로 주류가 아닌 정호용을 사령관으로 앉힌 것이다. 전두환과 '허씨들'(허화평?허삼수)이 (당시 권력의) 주류였다. 다만 정호용은 전두환과 아주 밀접한 사이였다."

- 장세동이 특전사 작전참모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장군 진급을 내다본다는 점도 있고, 특전사의 중요성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특전사의 핵심 인물은 장세동이 된다는 얘기다. 누구든 장세동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주류의) 외부에서 데려온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특전사가 12·12의 핵심 인물에 의해 장악된 것이다.

(특전사령관인) 정호용은 (권력의) 핵심 라인이 아니고 아웃사이드(outside)한 인물이다. 전두환과 가깝긴 하지만 12·12에는 가담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래서 (장세동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으로 배속된 직후부터 아웃사이더(outsider)로 몰렸다. 보안사는 김오랑(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의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정호용은 부대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게다가 김오랑을 국립묘지에까지 안장시켰다.

이러니 (권력의) 주류와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1979년) 12월 13일 아침에 사령관 인수인계식이 있었다. 그런데 정호용이 여단장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어젯밤(12·12) 부대 안에서 이루어진 총격전은 잘못된 것이다, 아군끼리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된다'는 훈시를 해버렸다. 12·12세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지휘력을 발휘한 것이다.

1980년 초에 정호용이 12·12그룹을 지원하려는 몇몇 인사를 전두환에게 천거했다. 하지만 허씨들이 그 인사들을 완전히 배제했다. 한 사람에게는 출국조치를 취하고, 다른 인사는 사업을 부도내 버렸다. 재정지원을 해줄 사람들이었는데, 허씨들이 이렇게 하는 바람에 창당자금 등이 고갈됐다."

-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이후 특전사는 정규 훈련은 제쳐두고 '진압 훈련'에만 집중했다는 내부자 증언이 있었다.

"특전사는 각 군에 배속돼 적을 후방에서 공격하는 전투임무도 맡고 있고, '대전복부대'라고 해서 데모 진압도 한다. 한 가지만 하는 게 아니라 두 가지를 병행한다. 즉 전술 훈련도 하고 데모 진압 훈련도 하고. 데모나 반란 진압하는 것도 특전사의 임무다. 5·18 나기 10일이나 보름 전부터 병력 출동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1주일인가 10일 전에 장세동이 작전과장 등 5명을 데리고 광주로 출동했다. 특전사 작전참모가 광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작전참모가 광주에 가고 부대 이동을 하는데도 사령관이 이에 관여하지 못했다. 철저하게 아웃사이더였던 셈이다."

- 1979년 12·12사태 이후 50사단장(대구)이던 정호용씨가 특전사령관에 임명됐다. 정씨는 12.12 사태에서 별다른 역할을 못했음에도 신군부로부터 중용된 이유는 무엇인가?

"정호용은 (1979년) 12월 13일 아침 9시에 특전사에 도착했다. 사령관으로 취임하기 위해 (대구에서) 올라온 것이다. 정병주가 전날 밤에 잡혀가면서 사령관 자리가 공석이 됐다. 13일 새벽 1시부터 아침 9시까지 부대지휘관이 없는 공백상태였다는 것이다. 전두환이 정호용에게 사령관 부임을 위해 올라오라고 지시했고, 밤새 지프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전두환을 만나고 특전사로 온 것이다.

정호용과 전두환은 인간적으로 가깝다. 서로 잘 통하고 신의가 두터운 관계였다. 전두환이 정호용에게 급히 올라오라고 하니까 바로 올라온 것이다. 정호용은 특전사 장교 출신이기도 하고 특전사 여단장(7여단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특전사 병사 시체가 발견된 직후부터 자위권 발동됐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

ⓒ 오마이뉴스 구영식

- 5·18이 유혈사태로까지 번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1980년 5월 계엄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을 잡아넣으면 광주에서 '소요'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아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계엄을 확대하지 않으면 김대중이 대통령을 하게 돼 있었다. 군은 장악했다고 하지만 정권창출이 안 될 판이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계엄을 확대해서 김대중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5월 17일 김대중을 잡아넣으니까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5월 18일엔가 처음으로 부대가 진입했는데 그날 특전사 병사 하나가 행방불명이 됐다. 그 병사를 못 찾고 있었는데 다음날엔가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병사들의) 격분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자위권이 발동됐다고 봐야 한다. 군에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사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데모 진압은) 유혈사태로 번진 것이다. 처음에는 실탄을 장착하지 않았다가 병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 실탄을 장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 하지만 특전사 병사의 사망은 장갑차에 의한 사고사였다는 주장이 있다."아니다. 시위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가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특전사에서 그런 상황을 서면으로 보고받았다. 사고사였다면 '사고사'로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데, 분명히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했다고 보고받았다."

- 당시 광주에는 특전사 공수여단과 20사단의 병력이 투입됐는데, 특전사 병력 투입을 결정한 주체는 계엄사령부인가, 보안사령부인가?

"계엄사에서 내린 것이다.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하는 조치가 있었다. 그것에 의해 병력 투입 조치를 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이미 장세동이 광주에 내려갔다. 장세동이 내려갈 때부터 병력 출동, 부대 배치, 작전계획 등이 다 수립돼 있었을 것이다. 계획이 한두 달 전에 세워지고, 연습까지 마쳐야 하는 게 작전이다. 군에서는 5월 17일 부대 이동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흥미로운 일화가 있었다. 특전사의 한 중위가 5월 17일 병력 이동할 때 김대중 자택에 전화를 해서 '특전사, 광주로 이동 중입니다'라고 전해줬다. 이것이 보안부대의 감청에 걸렸다. 중위급, 소위급 장교 중에서 김대중 자택 전화번호를 알 만한 장교들을 조사했는데 밝혀내지는 못했다."

- 현대사 연구자들은 1979년 12·12 사태 이후 군권은 물론이고 권력 자체가 신군부 세력에게 넘어갔다는 점에서 병력 투입을 결정한 곳은 보안사라고 보고 있다.

"(형식적으로 보면) 계엄 확대는 계엄사에서 나온다. 하지만 계엄 확대에 대비하는 것은 (신군부의) 핵심 인물들이 한다. 계엄사가 5월 17일 병력 투입을 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이미 광주 '소요'에 대비하기 위한 병력 배치가 있었다. 김대중을 잡아넣으면 데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보안사에서 했다."

-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특전사를 광주에 보낸 것은 잘못이다"( < 한겨레21 > 인터뷰)라고 얘기한 적 있는데.

"(1979년) '부마사태'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여단이 부산에 출동했다. 당시에는 사령부 캠프가 부산 한성여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데모 진압을 하는 것이 특전사의 임무 중 하나다. 김대중을 잡아넣으면 목포나 광주에서 반란이 날 것 같으니까 부대를 출동시킨 것이다.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는 예하부대가 없다. 31사단이 있지만 예비사단이라 실질적으로 시위를 진압할 병력은 없다. 그러니까 전북 금마에 있던 특전사 여단(7공수여단)이 먼저 출동한 것이다."

- 1980년 5월 21일은 공수부대원들에 의한 '집단 발포'가 이루어진 날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집단 발포'를 명령한 주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집단 발포는 특전사의 지휘계통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부대 이동 지시 등은 보안사에서 한 것이지만, 계엄사 지구 사령부가 설치되면 사령관과 예하부대 사단장이 지휘한다. 예를 들면 31사단에 배속된 여단장은 준장급인데, 여단장은 당연히 당시 사단장인 정웅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정웅은 나중에 '내 지시를 안 받고 딴 데서 온 지시를 받았다'고 했지만, 병력을 투입한 후에 지휘권은 지역 계엄사령관과 사단이 갖는다. 그런데 정웅처럼 '나는 허수아비였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 정웅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지, 특전사가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광주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할 때 정호용은 사령부에 있었다. 3일(5월 17일~19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상황보고만 받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사령부에 있었다. '부마사태' 때는 사령관이 현지에 출동했으니까 나도 같이 부산에 내려갔다. 정호용은 5월 20일엔가 처음 광주에 내려갔다. 그것도 내가 건의해서 간 것이다. 정호용이 지휘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12?12그룹은 처음부터 정호용을 안 보냈다. 그것은 12?12그룹이 그를 '안티(세력)'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만약 '특전사의 지휘계통'(공수부대-특전사령관-육군참모차장-권력실세?)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집단 발포의 직접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특전사령관은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서울에 있었다. 정호용은 서울에 있어서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특전사 여단이 사단에 배속되면 사단장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특전사령관, 5월 20일 처음 광주에 내려갔다"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

ⓒ 권우성

- 5월 17일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전 정호용 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 모든 부대에 1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린 것으로 아는데, 이것은 5.18 진압을 위한 격려금 아닌가?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돈이 특전사로 들어온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처음 듣는 얘기다. 출동하기 전 회식도 없었다. 그냥 지시받고 출동한 것이다."

- 정호용 사령관이 처음 광주에 내려간 것은 5월 20일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현지에 내려간 이유는 무엇이었나?

"5월 19일 예하부대에서 사령부로 무전보고하는 내용이 바로 북한 방송에 나왔다. 그래서 내가 사령관에게 '특전사 예하부대의 무전보고를 받지 말라'고 건의했다. 예하부대의 보고는 작전지휘계통에 있는 31사단장도 받지만, 특전사 상황실에서도 관련 내용을 보고받았다. 즉 7공수여단장이 31사단장과 특전사 상황실에 여단의 움직임을 보고한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중지해야 한다는 게 내 건의였다.

우리 무전보고 내용이 북에 감청당했거나, 광주에 있는 고정간첩이 북에 바로 보고했을 수도 있다. 나는 무전보고 내용이 북에 감청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무전보고 중지를 건의한 다음에 '필요하면 사령관이 직접 현지를 돌아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정호용도 가보겠다고 해서 육군 비행단 헬기부대의 협조를 받았다. 그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갔다. 그러니까 광주에 병력이 투입된 지 4일째 되는 날 처음 광주에 내려간 것이다.

정호용은 최초 3일 동안 사령관실에 나랑 같이 있었다. 나는 사령관을 감시하는 보안반장뿐만 아니라 사령관을 보좌하는 정보보좌관 역할도 했다. 사령관에게 오는 첩보를 모아 정리해 보고했다. 특전사는 사령관을 빼고 전부 전임 사령관이던 정병주 인맥들이었다. 그래서 다른 참모와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호용이 전두환의 허가를 받아 내게 정보보좌관을 맡겼다."

- 하지만 정호용 사령관이 5월 17일부터 광주에 내려와 지휘했다는 주장이 있다."전혀 아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내 건의에 따라 광주에 내려간 것이 5월 20일이었다. 그 전에는 부대에 있었는데, 내가 '노씨(노태우)하고 허씨들이 12?12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당신 찬밥 먹이고 있다, 당신은 (권력에서) 아웃사이더다, 전두환과 사이가 좋을지 모르지만 12·12 주역들은 당신이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지휘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광주 현지에 내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정호용은 (12?12 핵심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온 이후 계엄군의 실질적 지휘통제권은 특전사로 넘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31사단장) 정웅의 주장인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군 지휘계통으로도 할 수 없고, 특히 정호용은 현장에 있지 않았다. 5월 20일 처음 내려갔다가 바로 올라왔다. 그리고 21일 내려가 하룻밤 잔 뒤 다음날(22일) 바로 올라왔다. 23일과 24일에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때 보안사로부터 도청 '탈환' 작전을 27일에서 25일로 앞당기자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기억한다. 보안사에서 그런 의논을 해왔지만 정호용은 '계획대로 해야 희생이 적다'며 반대했다.

그러다가 26일 밤 8시께 광주에 내려갔다. 당시 비바람이 심하게 쳐서 헬기를 타고 갈 수 없었는데도 내려갔다. 전주에서 내려서 밤 11시엔가 광주에 들어갔다. 다음날(27일) 새벽 1시엔가 도청 '탈환' 작전이 예정돼 있었다."

- '작전지휘(명령)권'도 없다는 특전사령관이 왜 26일 밤 광주에 내려갔나?"예하부대가 작전을 하고 있으니까 관찰하기 위해 간 것이지 작전을 지휘하러 간 것은 아니다. 작전명령을 내린 쪽은 허씨들 중 한 명으로 추정한다. 허씨쪽의 한 사람이 도청 탈환작전을 당기자는 제안도 했다. 정호용은 알고 있다. 누구한테 (도청 '탈환' 작전을 앞당기자고) 전화가 왔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정호용은 '예하부대 판단에 맡겨야지 왜 그렇게 무리하려고 하느냐?'고 반대했다."

- 5월 20일, 21일, 26일 빼고 정호용 사령관이 특전사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내가 정호용과 같이 있었다. 국회 광주 청문회 때 미국에서 정호용에게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내용증명을 받고도 정호용은 국회에서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당시 정호용은 '광주에 왜 갔나?'라는 질문에 '시집보낸 처지에서 딸이 잘하고 있는지 보러 갔다'고 대답했다. '시집보냈다'는 것은 작전권을 위임했다는 뜻이다. '병력이 투입된 이후 19일까지 사령부에 있었고 현장에 가지 않았다'고 얘기했어야 하는데 정호용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정호용에게 전화를 걸어 '특전사령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죄를 뒤집어써야 하니까 바른 말을 하라, 내가 증인으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호용은 '죄를 공동으로 나누어 받는 게 한 사람 사형시키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내가 같이 짐을 같이 지고 가는 게 인간의 도리다'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나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웅 등이 제기한 '정호용 책임론'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

- 김기석 당시 전교사 부사령관은 "정호용 사령관은 진압을 위해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주장했는데.

"정웅도 '내가 사단당이었지만 여단장이 정호용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기석과 정웅 얘기는 모두 거짓말이다. 현장에 가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지휘할 수 있나? 지휘를 하려면 사령관과 모든 참모들이 현장에 가야 한다. 하지만 정호용의 몸은 사령부에 있었고, 작전참모(장세동)는 진작 광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휘를 할 수 있겠나?

예하부대를 배속시켰다는 것은 정호용에게 작전지휘권이 없음을 뜻한다. 시시각각 상황이 벌어지는데 현장에 왔다 갔다 하면 되겠나? 그들(김기석, 정웅 등)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특전사령관을 잡기 위해 사실과 다른 얘기를 했다."

-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에 머물지 않았다고 하는데, 백남이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는 "정 사령관이 와서 전교사에 별도로 사무실을 차렸다"고 주장했다.

"정호용을 전두환와 같은 무리로 묶어서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소리다. 사령관이 보고는 받을 수 있다. 예하부대장(여단장)이 현지 임무 수행을 보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작전지휘계통을 통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다. 정웅은 사단장 하다가 능력이 없어 교체됐다."

- 당시 특전사 예하 여단 병력이 전교사에 배속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발포를 명령한 '주체'는 윤흥정 당시 전교사 사령관 겸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었다는 얘기인가?

"(작전지휘계통상) 그렇다. 예하부대를 배속시켜놓으면 사령관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이래라저래라 하게 되면 지휘관이 두 명이 되는 셈이다. 정호용은 '적군이 아닌 시민을 보고 쏘는 일은 비극이다'라는 말도 했다."

- 하지만 윤흥정 사령관이나 정웅 31사단장은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 현지에 내려가 지휘하고, 보안사 말만 듣고 강경진압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전부 책임을 정호용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정싸움을 이용해 죄없는 사람을 살인자로 모는 주장이다. 그런 식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갈등을 극대화해서는 안 된다."

- 현장 지휘관 두 사람이 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나?"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정호용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1980년 5·18 당시 군의 지휘권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나?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사단장이 작전지휘계통이고, 그렇데 되어야 한다. 여단이 다른 부대에 배속된 상황에서 정호용이 작전에 개입할 게 없다. 보고만 받을 수 있지 작전을 지휘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연히 당시에도 계엄사 작전지휘계통이 살아 있었다고 봐야 한다. 정웅은 국회에서 '사단장이지만 지휘권이 없었고 여단장이 내 말을 안 들었다'고 계속 주장하는데, 이는 작전상황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배속된 부대 지휘관의 지휘를 거부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계엄사령관의 지휘체계 아래에서 작전이 이루어졌다.

정호용은 '데모대가 도망갈 길을 만들어놓고 진압을 했어야 하는데 정웅은 퇴로를 전부 차단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고 주장하더라. 퇴로를 차단한 채 작전을 하면서 데모대와 군인이 붙었고 희생이 크게 났다는 것이다. 퇴로를 차단할 만큼 정웅은 분명히 지휘권을 행사했다. (특전사에서 파견한) 여단장들은 당연히 정웅의 지시를 받았다.

어떤 부대에서건 사단장이 여단장을 불러 지시를 한다. 특전사 여단이 부대에 배치된 다음부터는 사단장이 작전을 지휘하게 돼 있다. 7공수여단은 정웅이 지휘하는 31사단의 배속부대였다. 그런데 특전사 작전참모였던 장세동의 역할이 뭔지 모르겠다. 전교사령관 작전참모로 들어갔는데, 5월 17일 이전에 광주에 내려가 어떤 일을 했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 '장세동'의 역할을 헤아린다면 결국 광주지역을 관할하는 군 지휘계통이 신군부에 의해 무력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장세동이 미리 내려갔으니까 전교사 작전참모로서 같이 '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장세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다. 장세동이 정호용에게 보고한 적이 없다. 그러니 장세동이 광주에서 뭘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장세동은 수경사 30단장을 하다가 12?12에 참여한 뒤 특전사 작전참모로 왔다. 그리고 5월 17일보다 훨씬 이전에 광주에 내려갔다."

- 아직까지도 '집단 발포'를 명령한 주체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 주체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정웅이 거짓말하고 있는데 명령의 주체 혹은 발포의 책임은 사단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전지휘관의 명령으로 발포하는 것이다. 이미 특전사 병사 한 명이 죽었을 때 자위권이 발동됐다. 그때 군인들에게 실탄이 지급됐고, 시위대에게 사격할 수 있게 됐다. 시위대에 잡혀갈 것에 대비해 무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병사 한 명이 죽었다는 사실은 은폐됐다. 그러니까 누가 발포했고, 발포시간이 언제냐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병사 한 명이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됐을 때 자위권이 발동됐다고 봐야 한다.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이 됐고, 그 다음날 아침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그 이후에는 관련보고가 전혀 없었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통해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하면서 5.18은 막을 내렸다. 사진은 '충정작전'으로 체포된 시민군.

ⓒ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5·18 강경진압은 보안사 핵심 실세에 의해 결정됐다"

- 5·18 진압과 관련해 신군부 안에서 미묘한 갈등이 있었던 셈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호용은 신군부 안에서도 소외된 인사였다. 12?12에 참여하지 않아 신군부 핵심세력들과 여러모로 마찰이 있었다. 그 사례가 언론통폐합 문제다. 정호용은 언론통폐합에 반대했다. 1980년 4월엔가 허문도가 언론통폐합을 하자며 국보위에서 결의하려고 했는데 정호용이 반대했다. 그래서 언론통폐합이 연기된 것이다.

5?18과 관련해서도 정호용은 '민간인 희생을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군과 싸워야지 왜 시민들과 싸우느냐'고도 했다. 12?12 핵심그룹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청 '탈환' 작전을 앞당기자고 의논했을 때도 정호용은 '원래 계획대로 해야 민간인 희생이 적게 난다, 전교사에서 하는 대로 둬라'고 반대했다."

- 허화평·허삼수·이학봉 등 보안사 핵심 실세에 비해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온건파'였다는 것인가?

"대체로 온건한 편이었다. 군인이 적군이 아닌 국민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정호용은 '정권 장악을 위해서 군이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군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도청 '탈환' 작전이 진행되기 전날인 26일 저녁 울기까지 하더라."

- 결국 집단 발포 등 '5·18 강경진압'은 보안사 핵심 실세그룹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면 되나?

"그렇다고 본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잡으러 갈 때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전두환이고, 실행한 사람은 허삼수다. 거사를 위해 총을 쏘는 사람은 또 총을 쏘게 돼 있다. 12·12 때 총을 쏘러 간 사람이 5·18에서도 그런 짓을 했다고 본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잡아간 최세창, 박종규 등의 상선(윗선)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그것도 전두환과 허씨들이라고 본다. 군이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군을 쏴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폭도'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게 신경 쓸 만한 일이었겠나?

12·12 발포자와 5·18 발포자는 동일선상에 있다. 전두환도 책임지고 허삼수도 책임져야 한다. 전두환은 자신에게 발포 책임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책임 회피다. 신군부의 허씨들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은 전두환이다. 그러니 책임도 져야 한다."

- 정호용 사령관은 5·18 진압에 직접 책임이 없음을 서영훈 전 적십자 총재를 통해 DJ에게 전달한 것으로 아는데.

"서영훈에게 이런 상황을 얘기했더니 김대중에게 '정호용은 발포자가 아니고 민간인 희생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얘기했다고 하더라. 서영훈은 국민화합을 위한 기구에 있으면서 '광주사태' 진상조사를 했다. 그 조사를 통해 정호용이 발포를 명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보수진영에서는 끊임없이 '5·18 북한 개입설'을 제기해왔는데."특전사 병력 이동 상황 등이 그대로 북한 방송을 통해 나왔다. 이것은 특전사의 무전보고내용을 감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전보고를 없앴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북한의 개입은 없었다고 본다.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근거는 없다. 무장공비가 투입됐다는 얘기도 아군 쪽에서 흘린 것 같다. 시위대 중에 북괴가 있었고, 그들이 총을 쐈다고 주장하지만 북괴가 시위대열에 들어온 적도 없다. 북괴개입설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물론 북한이 방송을 통해 한국 상황을 자신들이 유리하게 보도한 적은 있지만 실제 개입한 것은 없다. 무장간첩이 개입한 일도 없다."

- 끝으로 '작전권을 가진 미국이 광주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을 승인했다'는 '5?18 미국 개입설'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부대 이동 정도는 미국의 승인을 받을 사항이 아니다. 보고사항이지 승인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시작전은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진압을 위해 내려가는 부대 이동은 승인사항이 아니다. 국내 진압작전은 미국과 전혀 관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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