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서사시' 크로스오버의 상징

입력 2010. 4. 13. 20:10 수정 2010. 4. 13. 20: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122] 페이스 노 모어의 <에픽>(1989년)

1980년대의 대중음악 특히, 주류의 대중음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미디어를 통한 표준화의 양상이, 경박한 패션으로 점철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를 강화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개성보다는 유행을, 음악보다는 외모를 중시한 메이저 제작사들의 행태는 그에 대한 원인인 동시에 결과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인종 간 이성 간 음악적 크로스오버의 일반화가 그것이다. '모두에게 어필하는 보편적 음악'이라는 업계의 화두가 미국 사회의 다문화주의적 관점 확산과 만난 지점에서 얻은, 우연한 발견이었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거대한 성공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인종성의 탈색이라기보다는 혼색이라고 할 것이었다. 백인 주류의 포크 영지에 입성한 흑인 여성 트레이시 채프먼과 흑인 특유의 힙합 영역에 안착한 백인 그룹 비스티 보이스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음악적 혁신이었고 1990년대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잉태한 움직임이었다.

변화의 물결은 가장 보수적인 장르,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헤비메탈에까지 밀려들었다. 흑인 그룹 리빙 컬러와 여성 밴드 빅슨의 성공이 개별적 사례라면, 문자 그대로 메탈 기타와 펑크(Funk) 리듬을 결합한 '펑크 메탈'의 유행은 1980년대 후반의 포괄적 경향이었다. 흑인 보컬리스트와 동성애자 키보디스트가 포함된 5인조 라인업으로 출발한 페이스 노 모어는 그와 같은 크로스오버 메탈 경향의 상징적 존재이자 최대의 승리자였다. 비평가 이언 크리스티에 따르면, 그들은 무엇보다 "스래시 메탈과 랩의 영향을 가장 현명하게 결합한" 밴드였다.

데뷔 음반 <위 케어 어 랏>(1985)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며 가능성을 확인한 페이스 노 모어는 세 번째 음반 <더 리얼 싱>으로 스타덤에 등극했다. 빌보드 차트 9위까지 오른 싱글 '에픽'의 성공 덕분이었다. 1989년 여름 발표된 이후 변변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음반이, 8개월 뒤인 1990년 3월 싱글로 공개된 '에픽'의 인기에 힘입어 밀리언셀러 대열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에픽'은 스스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기도 했다.

'에픽'은 기이한 '서사시'였다. 메탈 기타와 펑크 리듬에다 랩 보컬과 클래시컬한 키보드를 결합한 이 노래의 개성은, 비평가 지나 아널드의 말마따나,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 나타난 그룹"의 독창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안'(얼터너티브)이었다. 그래서 비평가 매니시 아가월은 이 노래가 "드라마틱한 포켓 심포니"이며 "(1990년대 등장하는) 콘, 림프 비즈킷 등 뉴 메탈 계열의 밴드들에게 시금석"을 제공했다고 평했던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보컬리스트 마이크 패턴의 괴상한 유머감각 또한 '에픽'의 위상을 1980년대의 끝이 아니라 1990년대의 시작에 위치시킨 요인이었다. 예컨대 시종일관 "그것"에 대해 묘사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결국 "그것이 뭔데?/ 그것은 그것이지"라는 후렴구의 반복으로 귀결하는데, 스래시 메탈의 거창한 이념이나 힙합의 과장된 문제의식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였다고 할 것이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했다"던 페이스 노 모어의 술회는 '에픽'의 참신성이 분방한 태도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정책의 수장이 네티즌의 농담에 고소를 남발하는 나라에선 언감생심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21 구독]

공식 SNS 계정: 트위터 www.twitter.com/hanitweet/ 미투데이 http://me2day.net/hankyoreh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