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각성제' 채프먼의 용감한 노래

입력 2010. 3. 2. 19:20 수정 2010. 3. 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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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116] 트레이시 채프먼의 <패스트 카>(1988년)

오늘날 기회 균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실은 한스페터 마르틴이 <세계화의 덫>(1997)에서 경고한 '20 대 80 사회'를 향해 날로 고착화하는 형편이다. 인구의 80%가 좌절을 맛봐야 하는 세상. 그러나 요컨대, 문제를 느끼는 것과 비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패스트 카'를 1980년대 가장 용감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는 이유도 거기 있다. 레이거노믹스의 허울과 '미국의 비극'을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노래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당대에 없었다.

'패스트 카'에서 채프먼은 빈곤의 악순환을 노래한다.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가출한 어머니,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편의점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돌보는 딸. 꿈을 찾아 도시로 나섰지만, 비루하게 생존하는 고단함과 술에 빠져 허송하는 남자 친구를 통해 반복되는 악몽 같은 삶의 데자뷔. 그것은, 비평가 질리언 가의 말마따나, "증대하는 노숙자 대열, 폭등하는 범죄율 등 80년대 내내 미국 정부가 묵살해왔던 문제들을 제기하는" 증언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채프먼은, 스프링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질주하는 자동차'를 통해 현실 극복의 의지를 표상한다. 하지만 낭만적인 귀결이나 감상적인 전망은 없다. 담담한 어조와 객관적 서사 속에서 그것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드러내는 매개일 뿐이다. 고향을 떠나 달리는 차 안에서 미래를 꿈꿨던 연인들. "당신은 직업을 구하고 나는 승진할 거예요/ 그러면 빈민 보호소를 나와/ 큰 집을 구해 교외에서 사는 거죠." 그러나 그들은 현재에 쫓겨 또다른 기회를 찾아야 할 판이다. "당신은 빠른 차를 갖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빠를까요?/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해요/ 오늘밤 떠나든지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을지." 물론,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가 궁금증을 유발한다고 했다. "우리가, 음악이 아니라, 문학에서 기대하는 물음"을 성공적으로 로큰롤에 접목해냈다는 것이다.

싱글 차트 6위까지 오른 '패스트 카'의 성공으로 채프먼은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랐지만 스스로 "유명세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만델라의 고희를 축하하는 기념 공연에 올라 '토킹 어바웃 어 레볼루션'을 불렀다. 그럼에도 그 노래들이 담긴 그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은 차트 정상을 정복하고야 말았다. 질리언 가는 "현실도피적 주제를 노래한 백인들"이 주류를 장악한 당시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충격적" 결과라고 평했다.

카터 행정부에서 안보 담당 보좌관을 지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20 대 80 사회'에서 '티티테인먼트'(엄마 젖을 뜻하는 티티(Titty)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가 대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좌절한 8할을 달래기 위한 '양식과 오락', 히틀러가 얘기했던 '빵과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조어다. 요즘 티브이를 장식하는 오락물들이 그런 징후를 드러내는 인식의 마취제라면, 흑인이고 여성이며 동성애자로서 소수자(중의 소수자)를 대변한 채프먼의 체험적 진술로서 '패스트 카'는 현실의 각성제라기에 모자람이 없다. 생각건대, 로큰롤의 사회적 가치란 그런 것일 터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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