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교의 바스켓 休] 이기적인 男 우지원, '친절한 지원씨' 되다
"그 친구 참 많이 변했어. 예전엔 자기밖에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주위를 보더라고…. 가장 많이 달라진 선수가 아닐까?"
시즌 초반 농구인 A씨에게서 들은 얘기. 진심이 서려 있었다. 부러움의 눈총도 있었다.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남자를 지칭)에 대한 동경이랄까.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37, 울산 모비스)에 대한 얘기다. 그가 떠올린 과거 우지원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선수였다.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자신만을 위한 그런 남자였다. 젊은 나이에 엄청난 인기를 등에 업었으니 당연할 만도 했다.
1990년대를 농구스타들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농구대잔치 세대를 떠올린다. 그 시절 최고의 라이벌 연세대와 고려대 경기는 암표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체육관 앞에서 긴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성행이었다. 어떤 연예인보다 인기순위 앞 순위에 올라있던 농구스타들.
그 시절. 연세대를 이끌던 우지원은 인기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지금도 변함없는 그의 외모는 당시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기적인 남자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서른여덟. 결혼과 함께 두 딸의 아버지가 돼 있다. 세월의 흐름만큼 그 역시 많은 변화를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달라졌다. '황태자'에서 '마당쇠'로 수식어를 고쳐 달았고, 이제는 주장 완장을 차고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 기르던 말이 도망가 명마를 데려오고,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을 살린 말을 비유한 옛 고사. 한때 말의 꼬리처럼 장발의 헤어스타일로 코트를 휘젓던 그는 '인기스타' 우지원이 아닌 '인간적인' 농구선수 우지원을 꿈꾼다.
그는 이제 '친절한 지원씨'다.
# 2분 출장, 홈팬들 환호에 전율이…
지난 1월 10일 전주 KCC와의 원정경기. 우지원은 11월 17일 인천 전자랜드전 이후 1개월여 만에 출장 기회를 잡았다. 5분26초의 출장시간. 그가 기록한 것은 단 2득점. 한 번의 슛 기회에서 한 골을 넣었다. 그리고 소속팀 모비스는 KCC에 16점차 완패했다.
이미 패배가 결정된 상황. '가비지타임'에 코트로 나선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출신 선수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그는 당시 기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몸을 풀고 있었지만, 감독님이 불러 당황했다. 마치 신인이 부름을 받고 뛰는 것처럼…. 얼떨떨했다. 그냥 정신없이 뛰었다. 우리가 많이 지고 있어 뭔가 보여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운 좋게 한 골을 넣었다."
3일 뒤 대구 오리온스와의 홈경기. 상황은 역전됐다. 모비스가 21점차 완승을 거둔 날이다. 경기 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또 그가 나섰다. 무득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홈경기에서 우리가 많이 이기고 있었다. 4쿼터 종료 2분 정도를 남겨놓고 코트로 들어가는데 홈팬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마치 예우를 해주는 기분이었다. 정말 감사했다. 1~2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날은 그에게 단순한 출장 그 이상의 의미였다.
# 식스맨 꼬리표를 달다
우지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두 부류다. 최고의 인기스타와 식스맨. 요즘 농구팬들은 그를 식스맨으로 기억하고, 90년대 농구 열풍의 향수에 젖은 팬들은 그를 최고의 인기스타로 추억한다.
2004년. 그가 스타팅 명단 딱지를 때기 시작한 때다. 어느 순간부터 1쿼터가 아닌 2쿼터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참기 힘든 고통도 따랐다.
"아마 농구대잔치 세대 중에 나이 대비 식스맨을 가장 먼저 했을 거다. 20년을 베스트 멤버로 출전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적응도 쉽지 않았고, 당시엔 섭섭하기도 했다."
슛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던 그가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은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그는 화려한 식스맨으로 재탄생했다. 이상민(삼성)과 서장훈 등 같은 세대 선수들이 여전히 코트를 휘젓고 있을 때 그는 다른 길을 걸었다. 2006-2007시즌에는 모비스의 통합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는 우수후보선수상이라는 색다른 이력도 추가했다.
"사실 나도 더 뛰고 싶기는 하다. 슛은 항상 자신 있다. 하지만 팀이 워낙 잘 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희생한 만큼 팀 성적으로 보답 받는다고 생각한다. 속병을 앓아 봤자 나만 힘들다."
올 시즌 그는 출장시간이 더 줄었다. 농구인생 가운데 가장 적게 뛰는 시즌이다. 엔트리 12명 명단에 들지 못한 경기도 부지기수다. 팀 내 연습경기를 할 때도 유니폼 색깔이 바뀌었다. 그가 입는 유니폼은 붉은색(A팀)이 아닌 흰색(B팀)이다. 연습 때도 식스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허전한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못 받아들이면 팀에 영향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상대방 역할도 잘해줘야 주축 선수들이 실전에서 잘할 수 있다. 그게 내 역할이다."
그는 최근 출장시간을 거의 잡지 못하고 있는 동갑내기 김병철(오리온스)에게도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 5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다.
"병철이도 올 시즌 가장 적게 뛰어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병철이와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 '그래도 넌 올 시즌이 처음이잖아. 행복한 줄 알아라'라고."
# 손에 뗄 수 없는 농구공
그가 지금 뛰고 있는 곳은 코트가 아닌 벤치다. 그는 벤치에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소리를 지르거나 벤치 뒤에 서서 몸을 풀며 후배들을 응원한다. 교체 돼 나온 선수들에게는 빠지지 않고 조언을 한다.
유심히 살펴봤다. 그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농구공이다. 벤치에 앉아 있든지 뒤에 서 있든지 농구공을 손에서 떼지 않고 만지작거린다. 식스맨이 된 이후 벤치에서 공을 잡고 있는 일이 더 많아졌다. 오랜 습관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공은 머리맡에 두고 잘 정도로 항상 붙어 있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특히 내가 슈터라서 공을 항상 쥐고 감을 익혀야 한다. 언제 투입될지 모르니까…."
그가 잡고 있는 것은 농구공만이 아니다. 언제든 코트에 나설 수 있게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어린 선수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오프시즌이나 시즌 중에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경기 중간에 들어가 팀에 흡수되려면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경기에 뛰지 못하더라도 몸을 풀고 준비를 한다. 운동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그가 그토록 몸 관리를 열심히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다.
"벤치 군기도 중요하다. 내가 먼저 나서서 몸 푸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벤치에서 쳐져 있으면 뛰는 선수들도 힘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맏형이기 때문에 격려와 조언을 해주는 것도 모두 내 몫이다."
# 그를 변화시킨 가족
그가 농구대잔치에서 뛰기 시작한 것은 11년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살.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인기'라는 과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땐 그런 것들이 당연했고, 세상에는 자신 혼자뿐이었다.
"인간적으로 완성이 덜된 성장 단계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냥 붕 뜬 기분이었다. 팬들은 물론이고 누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지냈다. 20대 중반이 돼서도 어리긴 마찬가지였다. 팀을 위하거나 남을 배려하지 못했다. 운동만 하면서 나 자신만을 위한 투자만 했다."
2002년 8월 서른의 나이. 그에게 인생의 전환기가 찾아왔다. 다섯 살 연하 이교영(32)씨와 2년간의 비밀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모비스로 이적 후 2개월만이었다. 자신밖에 모르던 그에게 변화가 생겼다.
"책임감이 생기기 시작한 때다. 결혼을 하면서 생각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던 것 같다. 부모님도 이제 혼자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고, 주위 선배들의 조언도 많았다. 예전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얘기들이 마음에 와 닿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후 1년 뒤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는 주위를 더 돌아보게 됐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생겼다. 사랑을 받기만 했던 그가 사랑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삶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쳐지나갔던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게 느껴졌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부모의 영향도 컸다. 그에게 언제나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줬다. 나이가 들고 망가지는 스타플레이어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도 생각했다. 식스맨으로 벤치를 지키면서 그런 마음은 더 커졌다.
"식스맨으로 5~6년을 뛰면서 생각이 많았다. 좋은 추억은 그냥 가슴 속에 묻어두고 팀을 위해 그리고 내 미래를 위해 더 큰 것을 바라보게 됐다. 후보 선수들의 고통도 알게 됐고, 내 안에 안 좋은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 "아빠도 프로선수란다"
그는 요즘 걱정이다. 두 딸 아이 때문이다. 8살이 된 첫째 서윤이는 아빠가 프로농구선수라는 것을 알지만, 돌이 갓 지난 나윤이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 두 딸 아이에게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이 잊힐까 두렵다.
그는 올해 다시 FA(자유계약)으로 풀린다. 은퇴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그는 선수 생활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올 시즌 출장시간이 줄면서 첫째 딸 서윤이도 농구경기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요즘 첫째도 TV를 잘 안 본다. 보지도 않았는데, 봤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다. '아빠 뛰지도 않는데 뭘 봐'라고 하더라. 한편으론 섭섭했지만, 아이도 알거 다 아는 나이라서 '아빠는 나이가 많아서 많이 못 뛰어'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래도 그는 꿈꿔왔던 소원 하나를 이뤘다. 현역 시절 두 딸이 모두 경기장에 와서 아빠가 뛰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다. 지난 1월 잠실에서 가진 삼성전에서 두 딸이 모두 와서 경기를 지켜봤다.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소원 풀었죠."
# 난 운 좋고 행복한 사람
한창 잘나가던 90년대. 지금은 남자 팬도 많이 늘었지만, 당시 그에게는 여성 팬이 99%였다. 잘생긴 외모 덕이었다. 대신 그에게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도 붙었다. 농구 실력보다는 외모가 부각됐고, 과대평가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최고의 선수라는 표현보다는 실력에 비해 과대평가됐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팬들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다.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역대 통산 톱5에는 올라있다."
기자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었다. 프로농구 역대 통산 기록을 다시 살폈다. 그의 이름이 각 부문별로 톱5 안에 대부분 랭크돼 있었다. 정규경기 통산 득점 4위, 3점슛 성공 2위, 자유투 성공률 2위, 야투 성공 5위, 리바운드 8위. 통산 3점슛 성공률은 무려 40.1%였고, 자유투 성공률도 86.3%였다. 그의 외모와 인기 탓에 가려진 기록들이었다.
팬들의 기억 속에 남을 그에 대해 묻자 뜸을 드렸다. 수많은 팬들이 있지만, 은퇴 뒤 어떤 선수로 기억될 지 궁금했다. 그의 꿈은 소박했다. 적어도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수생활은 화려했지만 변함없이 자기관리를 잘했던 선수, 모든 생활에서 모범이 될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역대 슈터 계보에 올라갈 수 있다면 영광이겠지만…."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숙소 방을 공개했다. 지금껏 숙소를 공개한 것은 처음이란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비주의가 아닌 방이 지저분해서다. 하지만 복도 끝에 위치한 방에 들어서자 외모만큼 방도 깔끔했다. 침대 맞은 편 벽에는 팬들이 직접 만들어준 정성어린 액자도 걸려 있었다. 그가 책 한 권을 펼쳤다. 그가 선수생활 틈틈이 수업을 들어 졸업한 대학원 논문이었다.
이제 마지막 2권 밖에 남지 않았다는 그의 손 때 묻은 논문 표지에는 '지도자의 리더십 유형이 신뢰와 선수만족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었다. 인기스타에서 식스맨으로 농구선수의 또 다른 길을 넘어 은퇴의 길목에 다다른 우지원. 그 작은 책 한 권에 그의 미래 지도자 인생이 엿보였다.
그는 침대 위에 편안히 앉아 지난 화려했던 농구인생을 회상하듯 한 마디를 던졌다."19살 때부터 성인무대에 뛰어들어 과분한 사랑을 많이 받았다. 90년대 초·중반 농구 인기의 르네상스 영광을 다 누렸다. 난 참 운 좋고 행복한 사람이다."
※ 바스켓 休(휴)… 농구전문지 「점프볼」에서만 볼 수 있는 농구인들의 진솔한 뒷이야기와 농구팬들의 휴식과 같은 공간이 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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