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같은 록음악 '슈게이즈'의 탄생

2010. 2. 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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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113]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유 메이드 미 리얼라이즈>(1988년)

예술의 영역에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욱 중요할 때가 많다. 형식이 내용에 우선하는, 방법이 목적을 견인하는 경우다.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그런 측면이 두드러진 영역이 로큰롤이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 식으로 비유하자면, 소음과 음악적 환희를 동격화시킨 측면에서다. 기타를 모든 악기의 총아로 만든 매개가 로큰롤이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은 음량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구석 자리도 배정받지 못했던, 잠재력은 뛰어나나 활용도는 형편없던 악기의 위상을 (전기의 힘을 빌려) 극대화한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의 혁명적 발전은 연주법의 혁신을 도입한 예술가들의 덕이었다.

1980년대 기타 연주의 대세는 화려한 솔로와 현란한 속주였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과 잉베이 말름스틴에게서 나온 방법론의 혁신이 보편적인 형식으로 유행한 결과다. 한 박자 안에 수십 개의 음표를 몰아넣는 경이로운 속도전의 불바람 앞에서 기타의 잠재력이 마침내 그 한계를 드러내는 듯 보일 정도였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등장이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기타리스트 케빈 실즈의 연주가 핵심이었다. 그는 기타의 사운드를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처(질감)로 인식했다. 무정형의 거대한 음향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온라인 음악지 <피치포크>의 편집장 스코트 플라젠호프는 그가 "작렬하는 백색 소음과 희미하게 명멸하는 멜로디를 조합한, 선율과 리프가 아니라 질감과 음량을 더욱 강조한" 접근법으로 록 기타의 연주 형식을 즉각적으로 바꿔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비평가 제임스 헌터는 실즈를 "영웅적인 반영웅 기타리스트의 90년대 모델"이라고 했다. 1980년대에 이미 1990년대를 시연했다는 것이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실험은 기타 연주의 형식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보컬 파트조차 음향적으로 접근했다. 흔히 "천상의 것"이라는 수사를 헌정받곤 하는 여성 보컬리스트 빌린다 부처의 몽환적이고 순진무구한 음성은, 케빈 실즈의 소용돌이치듯 범람하는 기타 소음 이면에서, 꺼질 듯 호흡하며 극적으로 대조하는 질감을 직조한다. 이른바 슈게이즈(슈게이징) 혹은 드림 팝이라 불리는 새 하위장르의 시발점이었다. 이에 비평가 존 해리스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 "추상 미술에 대한 록 음악의 등가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유 메이드 미 리얼라이즈'는 그 새 방법론의 원형이었다. 플라젠호프에 따르면 '…리얼라이즈'는 "(향후) 슈게이즈로 알려지게 되는 (새로운 경향의) 최초 완성형"이며 "기타 중심의 음악이 하우스와 테크노의 최신 사운드로부터 도망하기는커녕 그것에 조응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잠재력은 있으나 결과물은 신통치 않았던 밴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영국 인디 차트 2위까지 오른 이 노래의 성공적인 실험을 통해 시대의 비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표절 시비를 일으키는 작곡가 때문에 최근 우리 대중음악계가 뒤숭숭하다. 그는 아마 '어떻게 하느냐'의 중요성을 곡해하고 있는 듯하다. 한 번은 운이고 두 번은 우연이며 세 번은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시스템이 멍청하고 거기 기생하는 자가 어리석은 것이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경우를 반면교사 삼을 일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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