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껴입어 더 빛나는 '눈물도둑'

입력 2010. 1. 31. 11:00 수정 2010. 1. 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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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20년만에 복간, 베스트셀러된 가슴짠한 성장 보고서<윤미네 집>…<서대문형무소> 등 복간 붐 이끌어

딩동! 벨이 울린다. 미국 '윤미네 집'에 한 권의 책이 도착했다. 덜컹 문을 열고 윤미가 책을 집어 든다. 두꺼운 마분지로 싸여 있다. 저 멀리 바다 건너 한국에서 온 책이다. 윤미는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다가 갑자기 펑펑 울음을 터뜨린다. 펑펑!

책 안에는 갓난아기 '윤미'가 있고,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양은 냄비를 홀딱 비우는 2살 '윤미'가 있고, 까만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입학한 단발머리 '윤미'가 있고, 결혼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서는 '윤미'가 있었다. 아버지가 찍은 사진들이었다. 아버지의 꽃보다 붉은 사랑에 윤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1990년 미국 '윤미네 집'이다.

딸이 태어나던 해부터 결혼하는 날까지 기록

윤미가 손에 들었던 책은 사진집 <윤미네 집: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이다. 이 사진집은 아마추어 사진가 전몽각(2006년 작고)씨가 자신의 큰딸 윤미가 태어나던 해부터 결혼하는 날까지 기록한 것이다. 1990년 사진가 주명덕씨는 긴 세월 전씨의 서재에 수북이 쌓여 있던 이 필름들을 세상에 끄집어내서 한 권의 사진집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 사진잡지 <아사히 카메라>에도 소개될 정도로 잔잔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년 전이다. 사진집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 소리 들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조용히 우리 뇌리에서 사라졌던 이 사진집을 월간 <포토넷>이 주명덕씨의 도움을 받아 2009년 12월 복간했다.

<포토넷>의 최재균 대표는 3년 전부터 "2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조용한 생명을 이어" 온 점이 놀랍다고 생각해서 전몽각씨의 아내 이문강(50)씨를 "졸라서 복간을 준비"했다. "내 자신이 사랑했던 책이고 가족이 해체되어 가는 시대에 의미가 있다"고 복간의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이문강씨는 "예전에도 가족 개인사가 세상에 그대로 드러나는 게 싫었다. 너무하다 생각도 했다. 그 사진들로 세상 떠난 남편을 다시 떠올리는 것도 고통이다"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남편 전몽각씨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 전씨는 2002년 췌장암 판정을 받고 2006년 고인이 되었다. "암 선고 받으셨을 때도 그 더운 날 몇 시간 동안이나 암실에서 작업을 했던 모습"이 떠올랐고 "고인을 위해서 몇 장이라도 남겨야겠다. 하늘에서 보면 좋아하실 거다"라는 생각이 들어 이씨는 마음을 바꿨다. 요즘 그도 남편의 카메라를 메고 사진을 찍고 있다.

아마추어 사진가 전몽각씨는 193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해서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60년 말에는 그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으면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돌멩이 하나라도 놓을 수 없었다. 성균관대학교 부총장까지 지냈던 그는 사진가보다 사진을 더 사랑한 이였다. 한국 사진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현대사진연구회에서 활동을 했고 죽음을 코앞에 두었을 때도 자신의 아내를 기록한 '마이 와이프'를 작업했다.(이 작업은 복간된 <윤미네 집>에 부록으로 실렸다)

사진집은 절절하다. 누리꾼들 사이에서 '눈물도둑'이라고 불릴 정도로 넘길 때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초점이 흔들리고 구도가 엉성하지만 바라볼수록 뭉클한 감동이 세포 마디마디 스며든다. 자상하고 섬세한 한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한국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던 우리 현대사 풍경과 함께 녹아 있다. 책에 실린 가족들의 추억담은 감동을 2배로 만든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 사진들을 보면서 제가 받은 사랑과 행복했던 시간들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곤 했어요"라고 윤미씨가 말하고 "그(남편)가 없는데 달이 뜨면 어쩌나, 비가 오고 눈이 오면 혼자서 어떻게 할까"라고 아내의 회고가 이어진다. 윤미씨는 20대 유학 시절에 만난 이와 결혼해서 아직까지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천상병 시 '귀천')로 시작하는 전몽각씨의 글도 있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쓴 글들이다. 아내와의 연애,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꼈던 소중한 사랑 등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이번에 복간되고 열흘 만에 2쇄 출판에 들어갈 정도로 사진애호가들에게 반응이 뜨겁다. 충실하게 기록한 사진은 누구에게나 진심을 전달한다. 그래서 기록은 중요하다. 사진이란 매체의 고유한 본질은 진실을 기록하는 것.

그런 면에서 2008년 서대문형무소 개소 100돌을 맞아 복간된 <서대문형무소>(열화당 펴냄)는 기록에만 천착한 사진집이다. 이 사진집은 1988년 당시 <조선일보> 사진기자였던 김동현(65)씨가 후배 민경원씨와 함께 이전을 앞둔 '서대문형무소'의 안과 밖을 기록한 사진집이다. 김씨는 "사진기자로서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의 진실을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흑백필름과 컬러필름 두 종류로 촬영을 했다. 광각렌즈를 주로 썼다. 사진기자라는 직업의 덕도 봤다. 당시에 그곳은 일반인들이 쉽게 촬영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법원과 서울시의 허락을 받아 경찰관 두 명을 대동하고 촬영을 했다." 그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다양한 빛으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1988년 초판과 달리 복간된 책에는 리영희 선생의 '서대문형무소의 기억', 심훈의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 김구의 '나의 옥중생활' 등의 글들이 있어 뭉클한 재미도 있다.

기록의 힘 느껴지는 <서대문형무소>

낙동강 물줄기처럼 흑백사진으로 쭉 이어지는 <서대문형무소> 사진은 기록의 힘이 느껴진다. 간간이 수감자들의 삶의 흔적이 보이면 배시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예쁜 여배우들 사진만 벽 한가득 붙어 있다든가 정부미 부대로 만든 생리대를 넣는 주머니가 걸려 있다든가, 생생한 그 시절이 있다.

때로 옛것이 한없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오래전에 출판되어 잠깐 우리 옆에 왔다가 사라진 사진집도 마찬가지다. 허전하고 아쉽다. 복간은 작은 위안이자 큰 사진작업이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제공 <포토넷>,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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