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메탈 '원초적 본능' 깨우다

2010. 1. 26. 18: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111] 건스 앤 로지스의 <스위트 차일드 오 마인>(1987년)

건스 앤 로지스의 성공은 이른바 '블랙 스완'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블랙 스완이란, "모든 백조는 희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에 빗대, 존재할 수 없는, 혹은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오스트레일리아 서안에서, 우리말로는 자체가 형용모순인, '검은 백조'가 실제로 발견되면서 그 의미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고, 2008년 금융위기를 예견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동명 저작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검은 백조를 역사의 해석에 적용하여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이른바 세 가지 속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희소성, 엄청난 충격, 그리고 소급적 예측 가능성. 문화비평의 논리 구조와도 닮은꼴이다. 예컨대, 경제학자에게 1987년 10월19일의 증권시장 붕괴(블랙 먼데이)가 검은 백조의 사례라면, 대중음악 비평가에게는 같은 해 7월 발매된 건스 앤 로지스 앨범의 충격파가 그에 상응하는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내 검은 백조로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건스 앤 로지스는 엘에이 음악계의 '검은 양'에 가까웠다. 그들은 당대 엘에이 메탈 밴드들과 닮은 점이 거의 없었다. 요란한 글램 스타일도, 달짝지근한 멜로디도, 엠티브이가 선호하는 뮤직비디오도 없었다. 반면에 파괴적인 공연과 폭력적인 태도와 자극적인 언행은 그들을 모두의 기피 대상으로 만들었다. 저널리스트 모리스 치텐든은 록 밴드들에게는 전설적인 일탈 행위들이 회자되게 마련이라면서도 "건스 앤 로지스에 관한 전설들은 모두 사실이라는 점에서 달랐다"고 썼다. 그들은 "과잉의 도시 엘에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불량 소년들"이었다는 것이다. 비평가 크리스 스미스 또한 "앞선 어떤 밴드와도 다른 방식으로 엘에이 뒷골목과 시궁창에서 영감을 찾았다"고 했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건스 앤 로지스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당대의 경향과 차별화시켰다. 크리스 스미스는 그들을 설명하기 위해 에어로스미스의 연주와 섹스 피스톨스의 태도, 라몬스와 뉴욕 돌스의 분노, 모터헤드의 열정과 롤링 스톤스의 이미지를 거론했다. 이언 크리스티는 에이시디시와 섹스 피스톨스와 메가데스와 하노이 록스를 언급했다. 어느 쪽 분석이 더 정확하다고 볼 게 아니었다. 요컨대, "건스 앤 로지스는 달랐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의 데뷔작 <에피타이트 포 디스트럭션>이 대중에게 발견되기까지 무려 일년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도 결국은 거기에 있었다.

싱글 '스위트 차일드 오 마인'은 앨범 <에피타이트…>를 정상에 올린 원동력이었다. 먼저 발표된 '웰컴 투 더 정글'이 달궈놓은 분위기를 절정으로 분출시킨 히트였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분위기도 대중적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특유의 사운드 조합은 결코 훼손하지 않았다. 액슬 로즈의 비할 데 없이 독특한 보컬, 슬래시의 인상적인 리프와 솔로, 이지 스트래들린의 맛깔스런 리듬 기타까지, 이 노래는 로큰롤의 원초적 본능을 생생하게 펼쳐냄으로써 1980년대의 인공성을 돌파하는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냈다. 헤비메탈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조차 거부할 수 없었던, 검은 백조의 마력이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21 구독]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