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음악 '흑백 색맹' 시대로

2010. 1. 1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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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110] 비스티 보이스의 <파이트 포 유어 라이트>(1986년)

비평가 넬슨 조지는 "힙합 구매자가 전적으로 흑인들뿐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건 오류"라고 주장했다. "숫자가 전설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레코드 판매량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최초의 힙합 히트곡 '래퍼스 딜라이트'가 골드 레코드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전미 음반판매업자연합'이 선정한 '올해의 싱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첫손에 꼽았다. "백인 청소년 관객층의 지지가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사례라는 것이다. 그 밖에도 증거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합에 관한 그릇된 신화가 유포된 이유는 뭘까? 그는 메이저 레이블과 신디케이트 방송의 보수성에서 원인을 찾았는데, 흥미롭게도 1980년대 헤비메탈에 대한 비평가 척 클로스터먼의 분석과 닮았다. 자본이 투자를 꺼리고 방송이 편성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객관적 지표가 당대 청소년 하위문화의 역동성을 반영한다는 의미다.

그런 측면에서 주목할 것이 힙합과 메탈, 두 장르의 가장 격렬한 극단인 하드코어 힙합과 스래시 메탈의 '아래로부터 혁명'이다. 방송 횟수가 차트 순위를 결정하는 핵심 인자였던 당시에 그것들은 거리와 공연장 밑바닥을 훑으며 주류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제와 1986년을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도 그것이다. 대중음악사상 가장 따분한 양상에 접근해 있던 당대 주류의 유행에 벼락처럼 내리친 몇 장의 앨범 - 메탈리카의 <마스터 오브 퍼피츠>와 슬레이어의 <레인 인 블러드>, 런-디엠시의 <레이징 헬>과 비스티 보이스의 <라이선스드 투 일>이 각각 스래시 메탈과 하드코어 힙합의 대중화 원년을 각인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슬레이어의 기타리스트가 참여한 비스티 보이스의 노래 '파이트 포 유어 라이트'의 성공은 특별한 상징적 가치를 갖는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비스티 보이스는 음악 자체의 혁신을 넘어 문화 전반의 변혁을 체화한 뜨거운 감자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유대인 혈통의 백인 래퍼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힙합이 백인 청소년들에게도 유의성을 띤 음악으로 이미 수용되어왔음을 스스로 방증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반면에, 그들의 데뷔작 <라이선스드…>가 힙합 앨범 사상 처음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한다. 여전히 공고한 인종의 장벽이 주류 시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가 알렉스 오그는 "비스티 보이스의 흰색이 시사논평가들에게는 두통을 안겨준 동시에 힙합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도 일조했다"고 썼다. 중요한 것은 그런 쟁점조차 힙합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속사이자 힙합 황금기를 연 최초의 레이블인 데프잼의 설립자들은 그와 같은 정황을 활용했다. 런-디엠시의 '워크 디스 웨이'를 합작해낸 두 사람 - 흑인 매니저 러셀 시먼스와 백인 프로듀서 릭 루빈은 비스티 보이스를 통해 흑백 간 크로스오버를 더욱 증폭시키려 했던 것이다. '파이트…'에 헤비메탈 리프와 기타 솔로를 삽입함으로써, 비평가 제프 챙의 말마따나, "런-디엠시가 백인 시장을 넘어서고 비스티 보이스가 흑인 시장에 어필하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힙합에 대한 대중의 색맹화는 그렇게 촉진되고 있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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