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인터뷰

2010. 1. 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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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사람들이 그립고, 또 고맙습니다"

"내가 말할 것이 있을까. 나는 그냥 40년 동안 따라다니는 것밖에 안했는디…."

이소선 여사가 안방에서 힘겹게 일어서며 기자를 맞이한다. 원래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 잡은 전태일재단에서 오후 5시에 만나 진행하기로 했다. 오후 5시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박계현 사무총장이 "어머니가 집에서 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재단 사무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이 있다는 것이다. 재단 사람들은 이 여사를 어머니, 엄마라고 불렀다. 재단 사람뿐만 아니다. 인연이 닿은 사람들은 다 그를 그렇게 불렀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까지도.

골목을 돌아 단독주택 2층에 자리 잡은 집에 들어섰다. 쌍문동 집을 떠나 이쪽으로 옮긴 지는 얼마 안됐다. 전태일씨의 동생 태삼씨는 6000만원짜리 전셋집이라고 지나가면서 말했다. 10평 남짓될까. 살림살이는 단촐했다.

이 여사의 이전 인터뷰들을 보면 대개 인터뷰어가 건강 이야기부터 운을 떼는 것이 보통이다. 오래 사셔야 한다는. 사진을 찍기 위해 힘겹게 일어나 앉은 이 여사가 말했다. "요즘엔 아무데도 못가. 누가 데려다 줘야…. 갇혀 있는 사람들을 내가 면회 가는 거보다 오는 게 더 많네. 오늘은 영 심하기도 하네." 당뇨와 혈압이 있다. 이 여사가 바짓단을 걷어 다리를 보여 준다. "박정희한테 두드려 맞았지 전두환한테 맞았지, 성한 데가 없어.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차고 때리고 이러는데, 한참 싸우고 다니다 보면 다리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게 느껴져. 왜 젖었나 벗어 보면 피가 고여 있고, 살점이 떨어져서 바지에 붙어 있고…."

고인이 된 두 전직 대통령과의 인연

벽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씨가 눈에 띈다.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쓰되 하늘처럼 여겨라'라는 뜻이다. 그 옆에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근조'라고 새겨진 검은 리본이 놓여져 있다. 전직 대통령과의 인연을 물어 봤다.

"김대중씨 상(노벨평화상) 탄 걸로 1년에 한 번 6·3빌딩 같은 좋은 데서 행사를 해요. 작년(2008년)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서로 생각이나 마음이 통하면 담배도 함께 태우고…. 내 혼자, 제일 먼저 가서 건강하셔야 되는데, 건강하십시오 라고 말하니 내 손을 잡으면서 어머니는 작대기 안 짚고 걸어 오셨습니까, 오래 사셔야 합니다 하고 얼마나 내 손을 잡고 그랬는데…." 태일이 분신한 얼마 후 청계피복을 찾은 김 전 대통령은 태일의 친구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된다'고 소상히 알려줬다. 이 여사는 덧붙였다. "(김 전 대통령을) 자주 뵈었다 급하면 찾아갔어. 그 이야기 하려면 참 길고…."

김 전 대통령에 이어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물었다. 경향신문에 연재된 내용 등을 보면 1987년 이석규 열사 장례식에서 노 전 대통령과 만난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게 처음이었을까. "예전에 데모하러 다닐 때 변호사니까 우리 청계 식구 잡아가면 변호해 주고, 데모하러 가면 함께 싸움하러 다니고….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친구처럼 살았어. 이석규 때 가서 전두환이 때려잡자 엿새 동안 소리 지르고 싸움하다가 인자 그때 양성동이라는 사람이 위원장인데 위원장도 처음 가니까 이렇게 하자고 하니 잘 듣더라. 그때 서울에서 내려간 모든 노동 운동 하는 사람들을 전두환이가 때려 잡으려고 했어. 장례식 날짜를 받으니까 모란공원으로 갈까, 광주 5·18로 갈까 그래 가지고, 차로 몇 대 해 가지고 번호를 정해주더라고. 나는 4번으로 정해 주는데 3번으로 바꿔 주더라고. 내 속으로 그랬어. 3번으로 바꿔 주는 거 보니까 가다가 문제가 생기겠다. 그래서 노무현 변호사한테 돈 얼마 있냐고 물어 보니, 엿새동안 사람들이 배가 고파하니 다 써서 3만원밖에 안 남았다고…."

엊그제 있던 사건처럼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이석규 사건이 1987년에 있었으니 벌써 30년 가까운 옛 이야기다. 긴 이야기다. '테레비'에서는 노사 분규 주동자로 이소선의 얼굴을 수시로 방영하고 있다. 가게와 여인숙에서, 경유했던 친척집과 숨어 있던 개포동 집과 병원에서 그를 체포하러 나온 경찰을 어떻게 따돌렸는지에 대한 회상이다. 한 편의 드라마다. 노무현은 이야기 초반에만 잠시 언급될 뿐 온데 간 데 없다. 이때 그와 함께 도망다닌 이는 민종덕(청계피복 노조 전 위원장)과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그리고 여익구씨와 이름 모를 서울대 학생 두 명이다. 그의 구술 자체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야 할 기억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어느 틈에 아들 태일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이 여사가 혼잣말처럼 말한다 . "인자 나는 이렇게 오래까지 살 것을 생각도 못하고, 살다 보니 이만큼 살았네. 몇 밤 안자면 팔십 둘이 되는데, (내 나이) 마흔 한 살 때 태일이가 죽었어. 후~." 긴 한숨.

전태일이 만난 할아버지의 예언

"…우리 아들이 마지막 죽을 때 내한테 말을 해 줬어. 내가 근로기준법을 6개월 배우라고. 쌍문동 208번지에 살던 게 1970년인데, 자꾸 우리 아들이 '엄마, 근로기준법 책 하나 사려고 하는데'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책 하나 사려면 돈이 얼마나 비싼데'라고 했는데 아들 말이 '배워야 되니까 엄마, 나는 돈이 없어' 하는 거라. 돈이 없는데 중앙시장에 나가 엿장수·고물장수들에게서 헌옷을 가져왔는겨. 씻어서 못 입고 내버리면, 그걸 사서 도봉동 천주교묘지의 연산군 묘지 뒤에 가면 물이 내려오는데 거기 가서 빨아서 바윗돌에 널어 말려서 집에 가져왔어. 떨어진 것은 꼬매고 새벽부터 나가서 빨아서 열나게 하면 중앙시장으로 해가 지기 전에 나갈 수가 있어요. 그걸 나가 팔았는데, 우리 딸 둘하고 아들 둘, 나하고 다섯이서 사는데 밤이면 그렇게 늦게 와요. 남들은 동네가 조용히 자는데 나와 보면 우리 아들 둘이 안오는 거야. 그때는 도봉동에서 수유리까지 다 보여요. 집이 없고 다 밭이었으니까.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는데 나중에 물어 보면 집으로 왔다가 일하러 가면 시간이 안돼서 잤다는 거야." 시래기죽으로 어렵게 살던 시절과 태일·태삼 형제가 취업된 뒤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엮여 나온 <전태일평전>에 실린 이야기다. 12살, 13살짜리 여공들에게 차비 털어 풀빵을 사 주고 걸어왔던 일, 추운 겨울날 자신의 점퍼를 벗어 어느 할아버지에게 준 일…. 지금은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가 책에 풀어 담은 이야기다.

"'회사에 걸어 놓은 것이 아니고 누구 줬어'라고 저기(동생 태삼씨)가 몰래 알려 준 거여. 아주 추운데 건너다니는 구름다리 위에서 할아버지 수염이 다 얼었데. (그 앞을 그냥 못 지나치고) 왔다갔다 하더라는 거여. (태삼씨가 보니)그걸 벗어서 할아버지에게 입혀서 단추까지 잠궈 주고 있더라. (그래서 태삼이 말하길) 그러면 나 주지 라고 하니깐 너는 커서 못입어라고…."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직후 토정비결을 보는 할아버지가 두 형제를 붙들고 신기한 예언을 했다. 태일이라는 이름이 '참 뜻을 열정적으로 펼치는데 명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이 여사는 '옷을 입혀준 할아버지'가 그 말을 했다고 말했다. 옆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던 동생 태삼씨가 끼어들었다. 옷을 건넨 할아버지와 토정비결 보는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거다. 다음은 태삼씨의 말. "내 얼굴과 형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형더러 '자네는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어요. 왜 그러냐고 하니 자네는 명이 너무 짧다는 거야. 뜻을 이루려면 이름을 바꾸라고." 노인이 태일씨에게 지어준 이름은 '태극'이었다. 태삼씨에겐 "앞으로 자네가 장남 노릇을 해야겠네"라고 말을 건넸다. 노인은 이 여사의 이름도 태일에게 물어보고 바꾸라고 했다. 소선이라는 이름이 평생 돈을 챙기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일이 '우리가 돈 벌어 잘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자 노인은 '산에 있는 작은 신선인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했다는 것이다. 노인이 추천한 이름은 이변진. 알다시피 이름을 바꾸진 않았다.

애초에 '삼십분이나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던 인터뷰는 다섯 시간을 지나 심야까지 이어졌다. 이 여사는 인터뷰 도중에 이명박 정부의 노동 현안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람들을 회상할 땐 자주 '그리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은 채로 말을 했지만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 30분. 막차가 끊길 시간이다. 문 밖에는 초저녁부터 내린 진눈깨비가 제법 쌓였다. 문 밖까지 배웅나온 이 여사의 말이 여운을 남겼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글·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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