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 리듬에 '인류애'를 녹이다

2009. 10. 2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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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98] 유투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1983년)

1972년 1월30일,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벌어진 인권 행진이 유혈사태로 얼룩졌다. 영국군 특수부대가 비무장 시위 군중에게 화기를 발포해 27명이 부상하고 13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망자 7명은 청소년이었고, 부상자 5명은 등에 총을 맞았다. 구교도 민족주의자와 신교도 연방주의자의 대립으로 오랜 내분을 겪어온 북아일랜드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에서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일컬어지는 이날의 사건은 단연코 최악의 것이었다.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신실을 음악적 메시지로 통합하고자 했던 아일랜드(공화국) 출신 록 밴드에게 그것은, 외면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는 동족상잔의 비탄임에 분명했다. 유투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가 무엇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불사른 비장한 호소문인 이유다.

주목할 것은, 유투가 이 노래를 개별 사건에 대한 비판으로만 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피로 물든 일요일에 대한 성찰을 인류애의 회복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촉구로 전화시켰다. "오늘 수백만이 울부짖고 있어/ 우리는 먹고 마시지만 그들은 내일 죽겠지." 거기에는 이란과 이라크의 중동 전쟁,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등 당시 눈앞에서 벌어지던 살육과 파괴의 참상 또한 반영되어 있었다. "참호는 우리들 가슴속에 파였고/ 어머니들과 아이들과 형제들과 자매들은 갈가리 찢겼지."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는 가사와 음악이 빚어내는 시너지의 표본이기도 했다. "가사를 제대로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분명히 성공했다"고 술회한 보컬리스트 보노의 말마따나, 이 노래의 탁월함은 메시지를 형상화한 사운드의 성취에서 비롯했다. 군악대의 진군가처럼 기계적인 드럼 비트와 불길함을 부추기는 단속적인 바이올린 선율, 터질 듯 팽팽한 베이스 라인과 거칠게 파열하는 기타 코드는 노랫말의 긴장감을 총체적으로 묘사해낸 음악적 이미지다. 그 음표들의 행간에 보노의 뜨거운 목소리가 궁극의 균형자로 개입한다. 살벌한 전장 풍경에 따뜻한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다. 유투의 음악을 "마침내 록의 에너지를 건설적인 무엇에 사용하려는, 실로 긍정적인 펑크"라고 했던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의 평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이 노래를 수록한 앨범 <워>가 영국에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를 밀어내고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증언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선데이…'와 <워>가 불러일으킨 반향을 발판 삼아 유투는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투를 최고의 밴드로 만들어준 세상은 그때와 지금 별반 다를 게 없다. '선데이…'의 첫 구절이 지금 여기 섬뜩한 예언처럼 들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의 뉴스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눈을 감고 떨쳐버릴 수가 없네/ 얼마나,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불러야 하나?" 용산 참사, 촛불 진압, 그리고 법치를 빙자한 일련의 폭력적 조치들 속에서 '피의 일요일'을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부르며 각성해야 하는 것일까?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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