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낭만주의' 뮤직비디오 날개 달다

2009. 10. 1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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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96] 듀란 듀란의 <헝그리 라이크 더 울프>(1982년)

대중음악사의 1980년대를 관통한 핵심 키워드는 뮤직비디오와 신시사이저다. 음악 창작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후자와 음반 홍보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전자의 결합은 대중음악계를 1970년대 후반의 슬럼프로부터 탈출시킨 활력소였다. 하지만 논란도 많았다. 신시사이저의 미학적 정격성과 뮤직비디오의 공공연한 상업성에 대해 평단이 보인 의구심 때문이었다.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존 릴랜드에 따르면, 반항과 반기성의 표상으로서 록의 미학을 구축해온 베이비붐 세대가 어느덧 기성세대로 편입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엉덩이 춤에 질색했던 자신들의 부모와 비슷한 입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적 세대차였다.

그럼에도 당대의 물신이 과거의 정신을 압도하는 경향으로 대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한 세계상이 있었다. 스프레이로 곧추세운 헤어스타일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패드를 넣은 재킷이 대표하는 80년대식 패션은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선전했던 레이건-대처 시대 이념의 형상화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비평가 솔 오스털리츠가 얘기한 "모든 것의 과잉"으로서 뮤직비디오와, 건반 하나로 오케스트라를 구현하는 기계로서 신시사이저는 철저하게 '80년대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화려한 비주얼 이미지와 경쾌한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결합시킨 '신낭만주의자들'(뉴 로맨틱스)이 '새로운 흐름'(뉴 웨이브) 속에서 '새로운 팝'(뉴 팝)의 기수로서 등장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던 셈이다. "레이건-대처의 80년대가 낳은 적자"(오스털리츠)이며 "엠티브이가 생성해낸 최초의 아이돌"(마크 웨인가튼)로 평가받는 듀란 듀란이 그 핵심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애초 뉴 로맨틱스는 철저하게 영국적인 현상이었다. 포스트펑크의 실험이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했고, (역시 영국적 현상이던) 글램 록의 영향이 남아 있었으며, 패션의 차별성이 하위 문화의 경계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던 배경이 영국에서 뉴 로맨틱스를 탄생시킨 요인이었다. 그런 국지적 유행을 국제적 흐름으로 안착시킨 매개가 다름 아닌 뮤직비디오였고, 무엇보다 듀란 듀란의 '헝그리 라이크 더 울프'였다.

'헝그리 라이크 더 울프'는 듀란 듀란이 미국 차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공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좀처럼 미국 시장 진출의 활로를 뚫지 못하던 그들은 유례없는 대자본을 투자한 이 노래의 뮤직 비디오를 통해 비로소 스타덤에 올랐다. 그들의 성공은 패셔너블한 영국 뮤지션들의 미국 시장 진출에 견인차 구실을 했다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른바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발화였다.

스리랑카 밀림에서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장면들을 차용해 완성시킨 '헝그리…'의 뮤직비디오는 제작 기법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선형적 내러티브와 비선형적 편집을 병치하고 이국적 풍물과 성적 판타지를 버무려냄으로써 뮤직비디오라는 새로운 미디엄에 문법적 전형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미 위원회가 1984년 신설한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부문의 첫 수상자로 이 노래를 지목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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