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성의 How are you] 체조 은메달리스트, 여홍철

박수성 2009. 8. 2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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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박수성] "체조를 시작하면서 운동을 그만두면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체조로 유명해지다 보니 어쩌다 한 단계 높아졌네요.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체조와 국민들의 성원에 감사하고 그만큼 체조를 사랑합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38). 한국 체조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목전에서 놓쳤던 여홍철은 카메라 앞에서 굵은 눈물을 흘려 국민들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당시 그는 외신기자 인터뷰에서 "3등이 목표였는데 2등을 했다면 좋다. 하지만 나는 1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다"고 말해 풀리지 않는 억울함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는 현재 경희대 체육학부의 스포츠지도학과 교수로 있다. 2003년 9월 임용을 받았으니 내달로 딱 만 5년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가장 아쉬웠다"

대부분의 스포츠팬들이 올림픽 은메달을 따던 96년의 여홍철을 기억하지만 그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다. 기술 완성도에서 가장 높았던 시기가 이때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운은 계속됐다. 당시만 해도 종목별 개인전의 경우 단 한차례 예선으로 결승 진출자를 가렸다. 그러나 그는 예선에서 작은 실수로 0.0몇점이 모자라 9위에 머물렀고 결국 금메달에는 도전해보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단 한차례 연기로 결승 진출자를 가리기 때문에 난이도 높은 기술을 쓴 선수들이 이상하게 줄줄이 탈락하고 말았죠. 결승전에 오른 선수들 연기를 보고 있는데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저기서 뛰고 있으면 금메달은 내건데…"

결국 국제체조연맹은 실력 좋은 선수들이 초반 탈락하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2004년 아테네올림픽부터 예선에서 두 번의 연기를 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유난히 도약지점부터 착지 지점까지 거리가 길었던 여홍철 때문에 '거리 가산점'(4m 이상)이 생긴 것과 함께 여홍철이 '체조 룰'을 바꾼 두 가지 사례다.

"아내 덕에 교수 꿈을 키웠죠."

체조를 시작할 때부터 그는 막연히 중·고등학교 선생님을 꿈꿨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은퇴할 때도 변함이 없었다. 교원 자격증을 따려고 했다. 그러나 5년 연애 끝에 1999년 결혼한 아내의 격려가 대학교수직에 도전하는 힘을 줬다.

"당신도 할 수 있어요." 그는 경희대에서 석사를 딴 후 한체대에서 2003년 '도마 손 짚고 몸 펴 앞공중 돌아 540도 비틀기의 역학적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침 그 즈음 경희대에서 운동역학 전공으로 교수 임용 공고가 나 32세의 나이에 교수가 됐다.

"지금은 정년퇴임하신 김진수 교수님의 권유로 원서를 냈는데 당시 주위에서 진짜 욕을 많이 먹었어요. 나이도 어린데 선배들 생각도 안한다구요. 그 때 몇개월간 진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경희대 체육학부 30명의 교수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직함만 10여개…왕성한 활동

맡겨진 일을 거절할 줄 모르는 그는 명함에 적어야할 직함이 10여개를 헤아린다. 경희대 체육대 총동문회 사무국장, 운동역학회 이사, 대한체조협회 이사·기술위원, 올림픽 성화회 이사, KBS 해설위원, 경수회 총무 …. 국내·국제대회가 있을 때는 심판으로 달려간다.

올해도 여름방학 후 베오그라드U대회, KBS배·교보·문체부장관배 대회 등을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개학이 코 앞이다.

여홍철은 "나는 연구자가 아니라 교육자가 되고 싶은데 요즘은 논문에 치여 후배나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쓸 시간이 점점 적어진다. 학교에서도 내 밑으로 6명의 후배 교수가 들어왔는데 아직도 나이로는 막내"라며 웃었다. "2020년 올림픽에 서정이가 내 한 풀어줬으면…"

여홍철의 부인 김윤지 씨는 2년 연하로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때 여자 대표팀 주장이었고 현재는 여자대표팀 코치로 있다. 부부가 모두 체조 국가대표 출신이다. 딸이 둘인 그는 현재 8살짜리 둘째 서정이에게 체조를 가르치고 있다. 표현력과 체력이 좋고 무엇보다 잘 먹지를 않아 살찌는 체질이 아니다.

여홍철은 "어릴 때부터 항상 몇년 뒤에는 뭘 해야 되겠다 하는 계획을 갖고 살았는데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지금에는 현재에 최선을 다 하려고 하고 있다. 아내도 대학강단에 뜻이 있으니 잘 풀렸으면 좋겠고 장기적으로는 서정이가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으면 한다. 2020년 올림픽에서는 내 못 이룬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뤄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홍철 이름 붙은 체조 기술, 현역 선수들 애용

여홍철이 체조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클럽활동을 체조로 정했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체조 선생님의 달콤한 한마디였다. "운동 잘 하면 대학도 공짜로 갈 수 있고 하루에 한번씩 빵·우유도 준다!"

무협영화를 좋아해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것을 꿈꾸던 여홍철은 어렸을 적부터 남들이 못하는 기술을 꿈꿨다.

중학교 1학년때 골수염을 앓아 1년반 동안 운동을 전혀 못하는 고비를 넘긴 그는 이때부터 머리 속에만 그리던 기술을 차차 현실화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그의 그의 성을 붙여 국제 공인기술이 된 '여(Yeo)' 기술이다. 한국 체조 선수의 성을 딴 기술은 평행봉의 '권(Kwon·권순성 선수)'과 '정(Jung·정진수)' 기술이 있지만 '여(Yeo)만큼 독창적이고 아직도 애용되는 기술은 없다.

'여 1' 기술은 94년 브리즈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선보인 기술로, 설명을 붙이자면 '손 짚고 옆으로 180도 비틀어 도마 집고 뒤로 세바퀴 돌기'다.

'여 2' 기술은 '도마 집고 몸 펴서 공중 1바퀴 반 돌아 옆으로 두 바퀴반 비틀기'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중국의 리샤오핑을 이기기 위해 개발한 고난도의 기술이었따. 여홍철의 기술은 착지 불안의 위험성은 있지만 화려함 때문에 금세 국제체조연맹의 관심을 받았다.

체조연맹은 최근 들어서는 아주 독창적인 기술이 아니라면 성이나 이름을 붙이는 것을 되도록 자제하고 있어 특정 선수의 이름이 붙은 기술을 보기는 점점 더 어려울 전망이다.

■ 여홍철은?* 출생: 1971년 5월 28일 전남 광주* 학력: 광주 학강초―조대부중-(조대부고→)전남체고(현 광주체고)-경희대(학사·석사)-한체대(2003년 박사)* 신체: 165㎝/65㎏* 가족: 부인 김윤지(36) 씨, 2녀* 주요경력: 91년 U대회 금메달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94·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3년 경희대 스포츠지도학과 교수* 취미: 골프(80대 중반 타수)

박수성 기자 [mercury@joongang.co.kr]사진=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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