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펑크' 시대 연 암울한 사랑노래

2009. 8. 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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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89] 조이 디비전의 <러브 윌 테어 어스 어파트>(1980)

조이 디비전이란 이름을 다루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운영했던 강제매춘 부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수인번호(카-체트닉 135633)를 필명 삼아 펴낸 체험소설 <더 하우스 오브 돌스>(1955)에서 폭로한 사실이다. 거기서 이름을 차용한 록 밴드라니, 일제의 군대위안부 만행을 기억하는 우리로선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명명이다. 논란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조이 디비전이라는 록 밴드는 숙고와 의문의 대상이라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낙인 같은 이름을 머리에 새기고 혁명 같은 음악을 가슴에서 뽑아낸 존재였다. 밴드 이름이 킬러스라고 해서 멤버들이 살인자들은 아닌 것처럼, 조이 디비전 또한 네오-나치 따위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유투의 보노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물이 공공연히 그들을 추앙한다고 밝힐 수는 없었을 게 분명하다. 이를테면 조이 디비전이란 이름은 '불편한 사실'이고, 조이 디비전은 그런 사실들을 들춰낸 불편한 밴드였던 것이다.

조이 디비전은 펑크의 허무주의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그 추진력은 보컬리스트 이언 커티스로부터 나왔다. 심각한 우울증과 간질을 앓고 있던 그가 염세적인 관점으로 인생을 보았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내적 상흔을 타자화시킨 노랫말로써 조이 디비전을 당대의 수많은 아류들과 차별화시킨 측면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그가 "인간성의 무한한 비인간성에 대한 숙고를 즐겼다"고 평했는데, 밴드 이름도 결국은 그런 태도의 산물이었다. 커티스가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끊임없는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그것이 종래 그를 자살로 몰아간 요인이었다는 사실도 그렇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의 말마따나 그는 "펑크의 허무주의를 개인적으로 체화한" 장본인이었다. 본격 활동을 펼친 기간이 채 2년도 안 되는 인디 밴드가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흔적으로 남을 수 있었던 저력 역시 거기 있었다. 커티스 사후 한 달 만에 공개된 싱글 '러브 윌 테어 어스 어파트'는 그 모든 것의 결정체였다.

조이 디비전의 최초이자 최후의 히트곡인 '러브 윌 테어 어스 어파트'는 역사상 가장 암울한 사랑노래 가운데 하나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를 맹세한 결혼 생활이 결국 "사랑이 우리를 갈라놓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향해 추락하던 상황을 묘사한, 커티스의 공개 유언장이었다. 주목할 것은, 모든 관계의 종말을 예견했던 이 노래가 새로운 관계의 실마리를 이끌어냈다는 사실이다. 음악적으로 이 노래는 베이스가 리드하고 키보드가 동조하는 어두운 사운드를 통해 이른바 '고딕 록'의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포스트펑크의 실험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역적으로는 고향 영국 맨체스터의 반골적 음악 전통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적으로는 밴드의 남은 멤버들이 뉴 오더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설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 한 시대의 종말은 그렇게 새 시대의 시작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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