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사회 안은 '힙합 라임' 대중과 조우

입력 2009. 8. 18. 19:00 수정 2009. 8. 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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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바꾼노래 88] 슈거힐 갱의 <래퍼스 딜라이트>(1979년)

힙합은 지난 30년 동안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준 대중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다. 게토 지역 흑인들의 전유물로 간주되던 양상이 어느덧 인종과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전지구적 청년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힙합은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가 걸었던 노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흑인문화적 특성의 반영이었고 백인 주류가 간과한 틈새로부터 나타났으며 궁극적으로는 시대를 주도하는 음악적 경향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슈거힐 갱의 '래퍼스 딜라이트'를 매미 스미스의 '크레이지 블루스'(1920)에 비견한들 어색한 일이 아니다. 최초의 블루스 히트곡으로서 '크레이지 블루스'의 가치를 인정하는 만큼, 최초의 힙합 히트곡으로서 '래퍼스 딜라이트'의 의미 또한 평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래퍼스 딜라이트'가 최초의 힙합 레코드였던 것은 아니다. 평자에 따라서는 길 스콧헤론이나 라스트 포이츠 등의 음반을 먼저 꼽기도 한다. 슈거힐 갱이 최초의 힙합 뮤지션이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힙합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디제이 쿨 허크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성에 관한 한 '래퍼스 딜라이트'와 슈거힐 갱의 성과에 근접한 사례는 전에 없었다. 이 노래는 싱글 차트에서 히트곡의 기준선인 40위권을 돌파한 최초의 힙합 넘버였다. 대부분의 백인들에게 랩이 여전히 생경한 표현 방식이었음을 고려하면 놀라운 기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좀더 주목할 것은 이 노래가 아르앤비(R&B) 차트에서 정상을 정복했다는 사실이다. 디스코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흑인 음악의 양상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9년 7월 12일 미국 프로야구단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에서는 '디스코 파괴의 밤'이라는 행사가 벌어져 관련 음반들을 파쇄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당대의 펑크 무브먼트가 디스코에 대한 혐오를 상당 부분 동력으로 삼고 있었다는 배경을 봐도 그렇다. 힙합의 부상은 흑인 음악의 새로운 대안이었던 것이다. '래퍼스 딜라이트'가 같은 해 발표된, 디스코 시대의 마지막 걸작인 시크의 '굿 타임스'를 샘플링한 곡이라는 점은 그래서 상징적인 시사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래퍼스 딜라이트'는 음악적 형식으로써 힙합의 진화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도 괄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래퍼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주지하다시피 힙합의 현대적 스타일은 랩을 담당하는 엠시와 사운드를 만드는 디제이가 결합한 창작 프로세스에 있는데, 슈거힐 갱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디제이의 몫이 훨씬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비평가 크레이그 워너의 말마따나, 역사적으로 "래핑은 흑인문화 내부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거힐 갱은 세 사람의 엠시를 내세워 흑인 사회 내부의 목소리를 정련된 라임으로 옮겨놓음으로써 랩의 수준을 상승시켰다. '래퍼스 딜라이트'는 힙합의 새로운 문법이 대중과 본격적으로 조우한 계기였던 것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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