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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바라 본 바다
▲ 외포리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바라 본 바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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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오전 5시였다. 이미 하얗게 밝아온 아침이 기침하고 있었다. 식구들과 정말 간단히 마련한 조촐한 식사를 했다. 어설픈 잠에서 깨어난 까닭 때문인지 입 속의 텁텁한 느낌은 무얼 먹고 싶다는 욕구를 저만치 달아나게 했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만 몇 번 들었다 놓고 말았다.

이미 마음이 서두르고 있었다.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서해의 작은 미지의 섬 '볼음도'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고조되고 있었다. 준비된 대로 멈칫거리지 않고 곧바로 강화로 향했다.

부두에 도착하니 바닷바람이 거칠게 불어 닥치고 있었다. 모자를 사납게 잡아당기며 구겼고, 옷깃을 할퀴듯 펄럭이며 잡아채고 있었다. 배 시간이 남아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작은 섬들을 조망했다. 갈매기가 떼를 지어 비행하고 있는 회색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흙탕물빛 세차게 출렁이는 흑갈색의 바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때마침 비는 오지 않았지만, 바람은 그 곳에서 강하고 야심 차게 불고 있었다.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물을 뚫고 파헤치며 돌아가는 스크류 엔진의 요란한 괴성은 절정의 건장한 사내가 뱉어내는 희열의 격정과도 같았다. 오르가슴에 도취된 듯 쉴 새 없이 물을 감아 돌리며 내뱉는 소리는 이내 수면 위 허공으로 거칠게 퍼져 나갔다. 그 소리에 잠시 넋을 놓고 멍 하는 사이 부두를 떠난 배는 육지와 더 이상의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처럼 더 멀리 빠르게 헤어지고 있었다. 

순항하는 배는 점점 뭇과 바다 사이 공간의 간격을 벌리며 물살을 찢는 듯 사납게 나아갔다. 뭇과 바다 사이의 계약된 관계를 통한 기계적인 사랑에 식상했는지 부두의 뒷모습을 서둘러 외면하는 듯 배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 배위서 서해의 바람을 맞았다. 몸으로 체감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때의 바람은 짭짤했지만, 빨랫줄처럼 질겼던 것 같다.

볼음도로 가는 카페리호 위에서 갈매기 떼를 만났다.
▲ 배 위에서 볼음도로 가는 카페리호 위에서 갈매기 떼를 만났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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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 인간의 습성을 간파한 갈매기들은 바로 내 눈앞에서, 머리 위에서 떼를 지어날고 있었다. 인간들이 던져주는 밀가루 과자부스러기 조각 속의 간간한 맛은 그들의 없음직한 짧은 혀를 기어이 사로잡았나 보다. 상승과 활강을 반복하며 바람을 타고 즐기는 그들의 눈빛과 욕망은 오로지 인간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향하고 있었다.

한 시간 반 정도 되었을까, 저만치 앞 바다에 흐릿한 섬의 흔적이 가물가물 가라앉은 듯 보였다. 마치 수반 위에 놓여진 운치 있는 자연석 수석(壽石)처럼 고요한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섬을 보니 마음이 바빠지고 있었다. 선착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어서 내리고 싶어 안절부절 발을 들썩거렸다. 미지의 섬이었던 '볼음도'와 처음으로 상면하는 순간이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자마자 식구들과 짐을 내렸다. 미리 소식을 듣고 나온 민박집 주인장이 트럭을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볼음도' 선착장의 바람은 웬일인지 배 위에서보다 더욱 신경질적으로 불었다. 모래를 섞어 뺨을 때리며 따갑게 신고식을 재촉했다. 우리 일행은 바람에 쫒기 듯 트럭의 짐칸으로 모두 올랐다. 옷을 벗길 듯, 모자를 허공 속에 날려버릴 듯, 볼음도의 바람은 그렇게 혹독하게 어수룩한 도시의 촌것들에게 겁을 주고 있었다. 우리들 일행은 바싹 서로 붙어 앉은 채 옷깃을 더욱 야무지게 여미며 움츠리고 있었다.

채 5분도 안 돼서 우리가 묵을 민박집에 도착했다. 민박집은 짚에다 황토 흙을 섞어 벽을 세워 지은 '스트로 베일' 하우스란다. 지붕은 너와집처럼 두툼하게 나무껍질과 나무토막을 잘라 이어 얹은 집으로 이름 하여 '흙집민박'이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담한 것이 첫인상 치고는 썩 괜찮아 보였다.

방을 나누고 짐을 풀자마자 아빠라는 어른 사내들은 자발적으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쌀을 씻어 밥을 앉혀놓고, 된장을 풀어 찌개를 끓였다. 집집마다 가져온 재료들을 꺼내서 씻고 썰어가며 그럴싸하게 먹음직한 접심 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 때였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오더니 '배고프다' 야단치고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빨리 밥 달라'고 아빠들을 적잖이 다그치고 있었다. 마침 그 시각 방안에서는 엄마라는 아낙들의 호호거리는 고소한 수다가 문밖으로 삐죽 새어 나와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황토방 안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아이들
▲ 시장이 반찬 황토방 안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아이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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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를 타고 가는 일행들의 발가락이 행복해 보였다.
▲ 즐거운 발가락 트랙터를 타고 가는 일행들의 발가락이 행복해 보였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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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반찬이라고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는 배부르게 점심을 먹었다. 밥 지을 때 함께 찐 옥수수 한 솥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때의 상황은 굶주린 사자 우리에 토끼와 닭 몇 마리가 던져져 눈 깜짝할 새 먹이로 삼켜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의 '리얼 버라이어티' 바로 그거였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 얼마 쯤 지나니 바람은 스스로 성을 죽이며 잦아들고 있었다. 사내들은 이 때다 싶어 아낙들이 방 안의 구들장을 차지하고 누워 피곤을 달래는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서 시원한 바다로 나갔다. 논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길가의 갈대로 풀피리를 불었고, 강아지풀을 뜯어 수염도 만들었다, 우리는 '조개골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한적하고 조용한 길을 따라 걸으며 하늘을 누렸고, 바람을 탔으며, 바다의 내음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었다.

조개골 해수욕장에 나가 바다와 만나서 놀았다.
▲ 바다로 간 아이들 조개골 해수욕장에 나가 바다와 만나서 놀았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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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트랙터 덕분에 갯벌로 걸어가던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길가에 모여 앉았다.
▲ 갯벌로 가는 길에서 고장난 트랙터 덕분에 갯벌로 걸어가던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길가에 모여 앉았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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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의외였다. 조개골 해수욕장의 해변은 파도를 타고, 바람에 밀려 온 인간의 쓰레기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서해의 작은 섬인 이 볼음도에도 탐욕으로 찌든 이기적 인간들에 의한 오염의 흔적들이 즐비하다니 문득 마음이 서글펐다. 그렇지만 해변의 모래는 가늘고 고왔으며, 길게 늘어선 휘어진 해안선의 풍경은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아이들과 함께 찝찔한 바닷물에 발을 담구고 종아리를 철썩 적셨다.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그냥 바다로 들어가 바다와 친구가 되어버렸다. 첨벙거리며 물 속을 걸었고, 바위틈에 놀고 있는 게를 찾아 함께 놀았다. 갯바위에 올라 살아있는 섬의 비린 향기를 가만히 음미하여 맡고 있자니 찰나의 몽롱함에 취하는 듯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지기도 했다.

바다로 나갔던 길을 되돌려 다시 오솔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사내들의 왁자한 기척을 감지했는지 아낙들은 방 안에서 두더지처럼 꼬리를 물고서 하나, 둘 밖으로 나왔다. 부스스한 낯빛의 아낙들은 사냥에서 돌아온 사내들을 환호하며 맞이하는 원시의 여성들처럼 우르르 몰려 나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바다가 여기서 얼마나 멀어?"
"해변은 깨끗해? 모래사장은 어때?"
"뭐하고 왔어? 뭘 잡았어? 재미는 있었어?"

아이들과 사내들은 짠물에 젖은 몸을 적당히 씻었다. 그러면서 으스대는 표정으로 바다에 대해 말해 주었다. 볼음도의 바다를 접촉하고 만진 느낌에 대해 소감을 말해 주었다. 섬이 가진 원초적 삶의 자연성과 원시성의 분위기에 대해서도 마냥 진지한 태도로 과장하여 말해 주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고, 사내들도 한동안 마루에 걸터앉아 몸을 말리며 쉬었다.    

얼마쯤이 지난 후 이번에는 아낙들이 나섰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자'며 아이들을 꼬드겼다. 갯벌에 나가 조개도 잡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도 잡아와서 구워 먹자며 선동했다. 아이들은 또 다시 우르르 방 안에서 몰려나와 고기 잡으러 바다로 가자며 어른 사내들 앞에 모여 서서 시위를 했다. 난감했다. 그런데 민박집 주인장도 난감했던 모양이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경운기와 트랙터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갯벌로 가기 위해 트랙터에 올라 웃음꽃을 피웠다.
▲ 웰컴 투 볼음도 갯벌로 가기 위해 트랙터에 올라 웃음꽃을 피웠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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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다 싶어 아낙들과 아이들은 몽땅 트랙터에 올라탔다. 옹기종기 몸을 맞대고 앉아 '어서 빨리 출발하자'며 재촉하는 표정으로 윽박질렀다. 하는 수 없이 주인장은 시동이 걸린 트랙터의 운전대를 힘껏 잡으며 바다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웬일인고? 민박집을 지나 약간의 오르막 경사가 있는 언덕 같지도 않은 초라한 언덕에서 트랙터는 급한 숨을 몰아쉬더니 고꾸라지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아낙들을 내리게 하여 바다로 향하는 쪽으로 앞서 걷도록 했다. 그리고 고쳐지는 대로 곧장 뒤따라서 태워가겠노라며 그들을 안심 시켰다. 주인장은 트랙터를 고치기 위해 식은땀을 흘려가며 연신 공구를 풀었다 조였다 반복했다. 하지만, 물 먹은 트랙터는 헛기침만 거칠게 쏟아내며 결국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갯벌까지는 트랙터를 타고도 약 30~40분이나 가야하는 거리였는데, 그쳤던 가는 비는 다시 내리고, 바람도 서서히 거칠어지니 은근히 걱정이 찾아왔다. 맨발로 해변에서 먼 갯벌까지 걸어 들어갔다면, 자칫 낭패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묘안을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주인장의 트럭을 몰고 그들을 구하러 가기로 했다.

넓게 펼쳐진 갯벌에서 조개를 캤다.
▲ 갯벌 넓게 펼쳐진 갯벌에서 조개를 캤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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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가 바람에 섞여 흩날리는 농로를 따라 급히 갯벌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트럭의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바다가 있는, 갯벌이 있는 해변으로 차를 몰고 돌진해갔다. 해변에 도착하여 썰물로 빠져나간 바다 밑의 속살, 시커멓게 드넓은 볼음도의 갯벌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저 멀리 아득한 거리에서 콩알만큼 작은 새끼 게들처럼 까맣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아이들과 아낙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가웠고 그제 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들에게 하염없이 손짓을 했다. '제발 여기 좀 쳐다봐 달라'며 팔을 뻗어 흔들었다. 하지만 그네들은 꿈적도 않는 모습인 듯했다. 더 멀리 더 먼 곳의 갯벌로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간 선배는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 갯벌로 향했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갔다. 나는 해변의 입구에 선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참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 뒤 쫓았던 선배를 따라 그네들이 열을 지어 갯벌 위를 질퍽질퍽 걸어  나왔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묘한 광경이었다.

트럭 짐칸에 그들을 모두 태우고 안도의 질주를 했다. 갈대 흔들리는 바람 부는 농로를 따라 덜컹거리는 낭만을 나눠주며 드라이브를 했다. 아이들과 아낙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생각하는지 트랙터 대신 트럭의 질주로도 얼씨구나 만족스러워 했다. 후면유리로 그들의 얼굴을 얼핏 살펴보니 하나같이 웃음을 띤 재미난 표정이었다.

민박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숯불을 피웠다. 그리고는 삼겹살을 노릇노릇하게 철망에 구워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듯 아이들과 아낙들을 먹였다. 지친 아낙들과 아이들은 따뜻한 방 안에서 어른 사내들이 진상하는 고기와 밥을 배불리 먹었다. 그 틈을 이용해 어른 사내들도 남은 고기 몇 점에 소주를 곁들여 꿀맛 같은 음주를 찬미했다. 사내들은 서로의 잔을 부딪쳐 두어 병의 소주를 낄낄거리며 순식간에 비웠고, 아낙들은 어떻게 귀신처럼 알코올 냄새를 맡았는지 급히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일행은 그렇게 시작해서 그날 밤을 깨소금처럼 고소한 추억의 밤으로 만들었다. 각자 부부들의 결혼이야기며, 연애 이야기를 안주 삼아 지루하지 않은 음주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냉장고 안에 대기 중이던 초록빛 소주병과 흑색의 병맥주들은 속이 빈 상태로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졌다. 그렇게 마신 소주는 입술과 혀와 목젖을 유쾌하게 마취시키며 단박에 목구멍을 타고 가슴 속으로 흘렀다.

어른들은 황토방 안에서 늦도록 행복한 음주를 만끽했다.
▲ 음주를 찬미하다. 어른들은 황토방 안에서 늦도록 행복한 음주를 만끽했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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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만 갔고, 아주 어릴 적부터 밤이 되면 들려왔던 이름 모를 산 새소리를 감상하며 칠흑 같은 어둠을 만끽했다. 어느덧 아이들은 자기들의 방으로 벌써 기어들어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일정한 리듬과 규칙으로 울어대는 밤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오히려 온통 주위를 고요하게 했다. 어쩌면 심오한 적막감으로도 느껴지는 평화로운 밤을 우리 일행들은 매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다음 날 새벽 5시쯤 우연히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저녁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방안에 온기가 훈훈했기 때문인지 몸이 느끼는 피로감은 무겁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와 아침을 맞으며 사람들을 조용히 깨웠다. 주인장 아저씨도 일찍 일어나 어제 그토록 애를 태웠던 트랙터를 손보아 고쳐놓았다. 서둘러 남아 있는 한 자루의 옥수수를 솥에 얹히고 불을 붙였다. 그러는 새 하나 둘씩 사람들은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지금 트랙터 타고 갯벌로 간다.
▲ 트랙터 타고 갯벌로 우리는 지금 트랙터 타고 갯벌로 간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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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를 타고 약 30~40분을 가니 조개들이 사는 갯벌이 있었다.
▲ 드넓은 갯벌 트랙터를 타고 약 30~40분을 가니 조개들이 사는 갯벌이 있었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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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에 시동이 걸렸다. 어제보다 훨씬 강하게 들려오는 건강한 엔진소리를 들을 수 있어 흡족했다. 사람들은 모두 트랙터에 올랐다. 솥에 쪄놓았던 옥수수를 한 가득 봉투에 담아 트랙터를 타고 가며 하모니카를 불 듯 뜯어먹었다. 일행 중에는 잠이 덜 깼는지 하품을 하는 아낙도 있었고, 눈곱을 비비며 떨어내는 아이도 있었다.

출발해서 약 10~20분쯤 지나니 해변이 나타났다. 다시 해변으로부터 곳곳에 미로처럼 박아놓은 막대 표시를 따라 한 30분쯤 드넓은 갯벌로 나아갔다. 육중하고 우람한 트랙터의 큰 바퀴는 예상 외로 갯벌 위에 얕은 흔적만을 남길 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트랙터 위에서 썰물이 빠져나간 광야 같은 볼음도의 갯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뱁새 같이 작고 쳐진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넓음, 거침없는 수평선, 간혹 끼륵거리며 주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 떼의 평온한 비행과 식사를 볼 수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저 아름다웠다.

의외로 갯벌은 멀고도 넓었다. 놀라울 정도로 멀고 넓었다. 토건주의자들에게 충분히 욕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유혹을 느끼게 하는 마치 공짜 같은 땅이었다. 알짜배기 부동산이었다. 방조제를 쌓고, 물을 빼 내고, 흙으로 메운다면, 분명 돈이 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그네들의 물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넓은 갯벌,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숨쉬는 생명과 생태의 보고인 갯벌을 그네들은 오직 돈 중심의 폭력적 개발주의로 뭉개려 하고 있으니 순식간에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갯벌은 환상의 사막이었다.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끊임없는 바닥의 연문(蓮紋)은 사막의 모래언덕에서 볼 수 있는 무늬와 꼭 같아 보였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빼어난 기하학적 문양이었고, 거장에 의해 창조된 입체구성, 아니 대지미술이었다. 잔잔한 파도의 에너지가 갯벌 바닥의 모래를 매우 부드럽게 밀고 쓰다듬어 만들어 낸 해양 예술 공원이었다. 햇볕이 쨍하지 않은 날씨였기에 그 느낌은 더욱 강렬했다. 흐릿하게 소금공기로 자욱한 볼음도의 회색빛 갯벌은 우리 모두를 편안하게 넉넉히 받아주고 있었다.   

갯벌에 펼쳐진 물결의 연속된 무늬는 모래사막을 떠올리게 했다.
▲ 갯벌의 연문(蓮紋) 갯벌에 펼쳐진 물결의 연속된 무늬는 모래사막을 떠올리게 했다.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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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그물이 쳐져 있는 곳에 도착해서 맨발로 갯벌을 밟았다. 주인장의 설명을 듣고서 짝을 이뤄 갯벌 속의 조개를 캐기 시작했다. 일명 '상합'이라는 조개를 캐는 재미난 체험이었다. 아이들을 한 녀석씩 데리고서 짝을 이뤄 준비한 도구로 모래층을 서서히 긁어 나갔다. 순간 도구 날에 뭔가 걸린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고, 아이와 나는 바닥을 손으로 마구 긁어 팠다. 그랬더니 손바닥 반 정도만한 크기의 조개가 진흙 펄 속에서 억울한 듯, 체념한 듯 생포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같이 짝을 이뤘던 옆의 딸아이가 갯벌이 떠나갈 듯 와아!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깜짝 놀랄 정도로 큰 환호성이었다.

함께 간 일행들도 각자의 영역을 정해 조개를 캐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함성이 연신 갯벌에 퍼져나갔다. 흙 속에서 마치 금을 캐내듯, 진주를 캐내듯 흥겹고 신나게 갯벌의 바닥을 긁었고, 온 몸을 적시며 손으로 갯벌의 흙을 파고 있었다. 언뜻 바다의 조개 밭에서 무리를 지어 일하는 어촌계 마을 사람들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열심히들 조개를 캐는 모습이었다. 아이들과 아낙들, 어른 사내들 모두는 얼굴에 하나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물망 자루는 온 몸을 던져 잡은 조개와 게들로 채워져 가고 있었고, 사람들의 가슴은 행복한 추억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약 2~3시간 정도가 흘렀다. 어느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과욕이 금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 모두는 그쯤에서 갯벌에서의 호강을 멈추기로 했다. 그래서 다시 트랙터를 타고 해변으로, 민박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늘을 바라보니 조금씩 구름이 엷어지고 있었고, 간간히 햇살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빠져나와 직사광선을 내리꽂고 있었다. 트랙터 위에 올라탄 우리들 일행의 모습을 보니 모두들 자기가 '부자가 된 어부'인 것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볼음도에서의 누리는 아들과 아빠의 조개잡이
▲ 조개잡이 부자(父子) 볼음도에서의 누리는 아들과 아빠의 조개잡이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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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들이 누리는 행복한 조개잡이
▲ 조개잡이 모녀(母女)들 엄마와 딸들이 누리는 행복한 조개잡이
ⓒ 송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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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조개의 살을 도려내 회를 만들고,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볼음도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음주를 했다. 잡아온 꽃게와 밴댕이 등에 된장을 풀어 넣고 끓인 해물탕에 밥을 말아 먹는 배고픈 자의 오찬은 정말 흡족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맛, 기분, 이런 만족스러움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낙원의 희열이었다.

돌아가야 할 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두르기로 했다. 짐을 싸고 정리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볼음도에서의 모든 추억과 하루 동안의 낭만을 잊지 않겠노라 생각했다. 이름조차도 몰랐던 미지의 섬 볼음도에서 더욱 싹튼 이웃들과의 우정, 가족들 간의 사랑, 사람과 생명에 대한 소중한 성찰을 고스란히 가슴에 새기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1박 2일이 금세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소중한 것은 아껴야 한다고 하는데, 현실을 망각한 즐거움에 너무 몰입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돌아가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으며 다시금 바싹 정신을 차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18~19일(1박2일)에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강화 외포리에서 하루 두 차례 출항하는 카페리호 승선하여 1시간 반 소요되며, 숙소는 민박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함. 트랙터 타고 바다로 나가 갯벌체험하는 것은 빠뜨리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태그:#볼음도, #볼음도 여름휴가, #볼음도 여행, #볼음도 갯벌, #조개골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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