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 전에 '디스코 여왕' 도나가 있었다

2009. 6. 2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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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80] 도나 서머의 <아이 필 러브>(1977년)

디스코는 총체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음악의 장르였고 춤의 종류였을 뿐만 아니라 춤추는 장소를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에세이스트 찰스 패너티의 표현처럼, 사람들은 "디스코(텍)에서 디스코에 맞춰 디스코를 췄다."

디스코는 또한 논쟁적인 문화였다. 1970년대 후반 인기의 절정기에조차 주류 바깥에서 주류와 충돌했다. 흑인, 노동 계급,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의 도피적 하위 문화에서 출발한 디스코는 태생부터가, 중산층 백인 중심 사회의 엘리트주의로 웃자란 록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종적, 계급적, 음악적 대립항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평가 캐럴 쿠퍼는 "1970년대 들어 팝 음악의 과거사에 존재했던 문화적, 상업적 아파르트헤이트가 다시 컴백했다"고 지적하고 "거기서 디스코가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디스코의 정치적 특이성은 음악적 특수성과 결합하면서 더욱 쟁점적인 것이 되었다. 디스코는 솔과 펑크의 지류라는 점에서 흑인 음악의 전통과 맞닿아 있었지만, 동시에 춤추기에 특화한 음악으로 '개발'되었다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적 감수성보다 유희적 기능성을 강조한 것이다. 초창기 디스코가 뮤지션이 아닌 프로듀서에 의해 주도되었고, 창조적 작품이 아닌 상업적 제품으로 간주되었으며, 보컬리스트의 역할 또한 스타성을 잠재한 프런트맨이 아니라 익명성을 담보한 세션맨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근원적인 이유가 거기 있다. 대중음악의 보편적인 창작 과정에 상치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톰 스머커는 "디스코의 미학과 그에 응답하여 발전한 음악"이 "기성적 록의 기준에 비춰 대안 없이 비인격화한 것들로 보였다"고 썼다. 도나 서머의 등장은 그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도나 서머는 디스코 시대의 최초이자 최대 스타였다. 디스코가 음악적 혁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자타공인 '디스코의 여왕'이자 당대의 디바로 등극했다. 서머는 무엇보다, 굽이치는 리듬 위를 넘실대는 육감적인 보컬로 디스코의 쾌락적 사운드에 인간적 희열을 불어넣었다. '아이 필 러브'를 극적으로 만든 구조적 요인도 마찬가지다.

이 노래는 모든 연주 부분에서 실제 악기의 사용을 배제하고 신시사이저의 기계음만으로 완성시킨 최초의 대중음악 히트곡이었다. 오로지 도나 서머의 보컬만이 실연이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이 필 러브'의 성공은 최고의 디스코 프로듀서로 꼽히는 조르조 모로더의 파격적 접근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것이었다.

미국 흑인 여성 서머와 이탈리아 백인 남성 모로더가 독일에서 만나 활동을 시작했다는 배경도 흥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미국 문화의 변두리에 머물던 디스코가 유럽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끝에 본국으로 역수입된 과정은 그것의 정치적, 음악적 특이점과 상호 영향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디스코와 록의 요소를 결합한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방법론, 그리고 전자악기를 전면에 부각시킨 신스팝의 사운드 등 1980년대를 지배한 경향들의 원형은 바로 그 과정에서 파생한 산물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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