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혼과 기술의 위대한 합창

2009. 6. 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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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바꾼노래 78]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1975년)

1970년대 중반은 대중음악사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음악적 다양성이 1960년대의 이념적 병목을 통과하면서 봇물을 터뜨렸다.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싱어-송라이터 계열을 필두로, 블루스 록과 서던 록, 펑크(Funk)와 디스코, 거기에 펑크(Punk)와 뉴 웨이브까지. 거대화와 세분화가 동시에 진행된 음악 시장의 현황은 그런 양상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그런 측면에서 당대의 아이콘적 지위는 단연 퀸의 것이었다고 해야 옳다. 레드 제플린처럼 육중하면서도 데이비드 보위만큼 컬러풀했던, 퀸은 그 모든 것인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너무 유명한 탓에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곤 하지만 실상, 퀸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밴드다. 음악적 다채로움부터 실존적 아이러니까지, 그 복합성은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당대의 평단이 당황했던 것도 당연하다.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그들만큼 호평과 혹평이 극단적으로 엇갈렸던 경우는 없다.

퀸은 신성한 미스터리보다는 복잡한 페르소나였고, 그 산물로서 앨범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는 다양성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일관성의 분열이라고 할 작품이었다.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 핵심을 응축한 '매그넘 오퍼스'(최고 걸작)였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무엇보다 독창적인 구조의 노래다. 템포와 코드가 각기 다른 다섯 개의 독립적인 악장을 하나의 완결된 악곡으로 결합시킨 구성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아카펠라 형태의 인트로(도입부)를 시작으로, 발라드와 오페레타와 하드 록의 형식을 차례로 넘나든 끝에, 수미쌍관 격인 아우트로(종결부)가 6분 가까운 연주 시간의 대미를 장식한다.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은 "(상이한 두 곡을 결합하여 파격적 실험을 선보였던) 비틀스의 '어 데이 인 더 라이프'가 한끼 식사라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푸드코트의 뷔페와 같다"고 비유했을 정도다.

다층적 메타포와 다양한 고유명사가 난무하는 노랫말의 의미도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널리 알려진 '사형수의 독백'이라는 주장은 기실 평면적 해석에 불과하다. 곡을 만든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는 비밀을 안고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멤버들은 그의 뜻에 따라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진실은 아마도 욕망과 죄의식, 죄와 벌,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뿐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기술과 예술의 동거를 보여주는 전범이기도 하다. 오페레타 부분의 거대한 합창을 멤버들의 음성만으로 구성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것은 무려 180여 회의 오버더빙(중복녹음)을 거쳐 음역대별로 축조한 '소리의 벽'이었다. 이 노래의 홍보를 목적으로 제작한 영상이 현대적 뮤직비디오의 원조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도 그렇다. 단순히 연주 장면들을 편집하는 차원을 넘어, 음악의 본질을 영상의 언어로 묘사하고자 했던 대담한 시도의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시종일관 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음악지 <롤링 스톤>조차 "사랑하지 않을지언정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 까닭이다. 물론 결과론이지만, 대다수 대중은 열렬히 사랑하는 쪽을 택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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