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이 낳은 미국 록의 '메시아'

입력 2009. 6. 2. 18:10 수정 2009. 6. 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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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77]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본 투 런>(1975년)

1975년 10월27일, 미국 미디어 업계에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양대 시사주간지 <타임> <뉴스위크>가 동시에 같은 얼굴을 표지 모델로 삼은 것인데, 관건은 그들 커버스토리 속 인물이 유력 정치인도 거물 경제인도 아닌 일개 록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막 스타덤에 올라서기 시작한 참이었다.

음악 산업의 변방 뉴저지의 촌놈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도 이루지 못한 진기한 기록의 주인공으로 대중음악사 복판에 등장하던 날의 풍경이다.

그는 갑자기 돌출한 변수처럼 보였다. 앞서 발표한 두 장의 앨범으로 변변치 않은 성적만 확인했을 뿐인 신출내기가 순식간에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장 뜨거운 스타로 거듭났으니까.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다르다. 스프링스틴은 1960년대 후반부터 오랜 기간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열정적인 라이브 콘서트로 지역시장에서 작지만 단단한 명성을 구축해왔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주류 시장으로 입지를 넓혀왔던 것이다. 존 랜도는 1974년 봄 진작에, 대중음악 비평사상 가장 유명한 문장 가운데 하나를 그에게 헌정한 바 있다. "나는 로큰롤의 미래를 보았다. 그 이름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 그렇게 무르익은 기운이 세 번째 앨범 <본 투 런>의 발표와 때를 같이 하면서 폭렬하는 불꽃으로 솟아오른 것이었다.

비평가 제임스 밀러는 그의 벼락같은 등장을 "음악적 메시아의 출현"으로까지 묘사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가 창조해낸 가상의 록스타 캐릭터인 '지기 스타더스트'에 빗대, 스프링스틴은 "구원자를 가장한 존재가 아니라 진짜 구원자였다"는 것이다. 그런 판단의 근거에는 급격한 비대화로 위기를 맞은 70년대 음악 산업에 대한 성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큰롤이 본래 가치를 잃고 주류 시장의 '공산품'으로 전락해가던 상황을 되새긴 것이다.

한편으로, 당대를 지배한 영국산 록 음악에 대해 미국적 자존심을 일깨웠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었다. 거칠지만 순수하고, 새로우면서도 전통적인 스프링스틴의 음악에서 미국의 비평가들은 아메리칸 로큰롤의 부활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세 번째 앨범의 동명 타이틀 트랙인 '본 투 런'은 초기 스프링스틴 음악의 정수다. 데뷔 이후 줄곧 천착해온 미국적 가치에 대한 주제의식이 뜨거운 응어리를 토해내는 듯한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에 현실 극복의 이상을 투영하는 특유의 어법으로, 노동계급 젊은이들의 현실을 통해 아메리칸드림의 좌절과 개척자적 탈출을 노래하는 보통사람들의 찬가. 그래서 관객들은 스프링스틴을 '노동계급의 영웅'이며 '보스'라고 불렀고, 비평가들은 그의 음악에 미국적 본질로서 '하트랜드(Heartland) 록'이라는 애정어린 꼬리표를 달아주었던 것이다.

평범한 영웅의 위대한 도전을 허망하게 쫓아버린 우리의 실패를 기억할 일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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