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극적인 아이러니

2009. 5. 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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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78] 레너드 스키너드의 <프리 버드>(1974년)

상식의 금기를 넘나들었던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는 "미국 사회에서 감히 남부 사투리의 억양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즉각적으로 불신을 받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수많은 배우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최소화하거나 지우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고착된 남부의 반동적 이미지가 주류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지적한 말이었다. 그러므로 1970년대 입구의 언저리에서 불쑥 치솟은 '서던 록'의 열기는 미국인들 스스로에게 사뭇 당황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것은 모순적인 상황이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전세계가 향유하는 대중음악의 뿌리는 미국 남부의 토양에서 생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던 록을 특정하는 음악적 요인들만 봐도 그렇다. 컨트리 앤 웨스턴과 리듬 앤 블루스의 원형을, 즉흥성과 비중의 측면에서 재즈에 비견할 솔로 연주와 함께 담아낸 하드 록 사운드가 그것이다. 익숙한 전통의 충실한 재연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서던 록이라는 분류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비평가 존 코바치가 지적한 바대로, 서던 록이라는 명칭은 남부 사람들이 내세운 브랜드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붙인 꼬리표였다. 골 깊은 불신감으로 아로새긴 '주홍글씨'였다. 그래서 비평가 조 패토스키는 "70년대의 서던 록 신화는 순진한 낙관주의와 지방색, 그리고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정도는 간단히 추월해버린 불가피한 비극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분석했던 것이다.

레너드 스키너드는 서던 록이 탄생시킨 최대의 스타였고, '프리 버드'는 그들을 상징하는 노래였다. 그래서 관객들은 항상 공연의 막바지에 '프리 버드'를 연호했고, 레너드 스키너드는 언제나 이 노래를 커튼콜 후의 마지막 연주로 남겨두었다. 오리지널 버전 자체가 9분을 넘는 대곡인데다 공연에서는 15분을 전후한 확장 버전으로 연주된 이 곡에서, 압권은 세 대의 리드 기타가 작열하는 솔로 연주 파트에 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영원토록 폭주할 것처럼 경합하는 연주자들의 전면전은 일렉트릭 기타의 카타르시스를 최대치까지 증폭시킨다.

'프리 버드'는 1977년 10월20일, 레너드 스키너드 멤버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비행기 사고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자유로이 나는 새'와 '추락한 비행기'의 반어적 대비였던 때문이다. 레너드 스키너드가 당초 이 노래를 1971년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듀언 올맨(서던 록의 원조 격인 올맨 브러더스 밴드의 기타리스트)에게 헌정했었다는 사실도 거기에 일조했다. 서던 록이 타고난 출신 성분의 비극적 은유에 대한 체현이었을까? 그 결과 오늘날 '프리 버드'는 운명의 극적인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라이트모티프(특정한 인물·사물·감정 등을 상징하는 동기)로 남았다. 하긴 노랫말조차 그 어떤 죽음에 부쳐 어색함이 없다.

"오늘 내가 여기서 떠난다고 해도 / 당신은 여전히 나를 기억할 건가요? …더 이상 모든 것이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 나는 지금 새처럼 자유로우니까요." 문득,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 떠오른다. 부디 영면하시길.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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