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음악 역사를 다시 쓴 23분

2009. 5. 1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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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77] 크라프트베르크의 <아우토반>(1974년)

양차 대전을 치르며 독일이 파괴한 것은 물질적인 가치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의 문화적 전통에도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독일은 스스로 가해자였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유럽 내에서도 독보적이었던 독일의 음악적 전통이 명맥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같은 시기에 미국의 대중음악이 구대륙을 휩쓸고 음악적 판도를 바꿔놓았다는 사실은 그 여파가, 비록 복잡한 연관성으로 얽혀 있기는 했지만, 얼마나 현격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미국은 1차 대전 이후 재즈를, 2차 대전 이후 로큰롤을 각각 유럽에 이식하며 대중음악의 세계화 시대를 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독일은, 한스 아이슬러와 쿠르트 바일 같은 마이스터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현대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연결고리를 새로운 전통으로 수렴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독일이 대중음악사에 남긴 흔적이라곤 엘비스 프레슬리의 군 복무지였으며 비틀스의 무명 시절 근거지였다는 호사적 일화들뿐이었다. 이른바 '크라우트록'이 등장한 배경은 그처럼 황량했다.

크라우트록은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독일 음악계의 대세를 주도했던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독일을 비하하는 표현의 크라우트와 록 음악의 합성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영미의 주류 평단은 그것을 철저하게 '독일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 등 고전음악 전통의 현대음악 실험에다 사이키델릭 록과 전자악기 등의 대중음악적 가능성을 결합함으로써 구체화시킨 독일산 하이브리드라는 것이었다. 크라프트베르크는 그 속에서 탄생한 돌연변이의 진화형태였다.

크라우트록이 비로소 독일 대중음악의 정체성을 발현한 현상이었다면, 크라프트베르크는 마침내 그것을 세계 시장에 각인한 존재였다. 크라우트록이 음악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성과 없이 쇠퇴하던 70년대 중반, 크라프트베르크는 노선 변경을 선언한 네 번째 앨범 <아우토반>을 통해 독보적 밴드로 거듭났다. '발전소'를 의미하는 밴드 이름에 내재하던 테크놀로지 지향적 태도가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과 보코더(음성변환장치) 등의 전자적 방법론과 만나면서 전대미문의 음악적 혁신을 낳았던 것이다.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이 "대중음악의 새로운 팔레트"였다고 평한 타이틀 트랙 '아우토반'은 바로 그 변혁의 상징이다.

'아우토반'은 무엇보다, 인간의 목소리마저 기계적으로 왜곡시킴으로써 노래에 대한 개념을 뿌리부터 뒤흔들어놓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시도였다. 게다가 23분에 육박하는 오리지널 버전을 4분짜리 싱글로 편집한 작업이나, 그렇게 압축된 버전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대중적 성공을 거둔 과정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크라프트베르크가 이후 일렉트로닉 음악 전반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은 그렇게 구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평가 맷 스노에 따르면 '아우토반'은 현대사회의 물질적 병리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동력과 여유를 축복하는 동시에, 반복 행위와 통제 불능의 어렴풋한 불안감을 조종자의 입장에서 내색한다"는 것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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