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신앙과 음악을 일체화하다

입력 2009. 5. 12. 23:10 수정 2009. 5. 1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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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76]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의 <노 우먼 노 크라이>(1974)

때로 한 장의 인물사진이 시대의 정서와 정세를 상징하곤 한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주장처럼 "모델을 정신적으로 인지"함으로써 드러나는 "사진의 심리적 측면"이, 중세의 성상화와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경우다. 학생 운동이 절정에 이른 1960년대 후반 전세계의 대학 캠퍼스를 벽지처럼 장식했던 베레모의 체 게바라와 인민복의 마오쩌둥 사진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건대, 1970년대 중반 그 사진들을 대체한 것은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드레드록 헤어스타일의 밥 말리 초상이었다. 그것은 일개 록 스타의 포스터가 아니라 정치와 신앙과 음악을 일체화시킨 영웅적 존재의 이미지였다.

비평가 윌리엄 매킨은 "어떤 대중음악가도 정치적 존재감과 음악적 위상을 밥 말리와 같이 결합시키지는 못했다"고 평했다. 실제로 말리는 가난한 섬나라 자메이카를 레게 선율의 명료한 이미지로 세계인의 뇌리 속에 각인시킨 위대한 뮤지션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제3세계 부흥 운동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300년 넘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1962년 비로소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자메이카는 여전히 인구의 2%가 부의 80%를 독점하는 불평등의 나라였고 빈곤이 범죄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수도 킹스턴의 대표적 슬럼인 트렌치타운의 비루한 공공주택단지에서 성장기를 보낸 말리는 그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노래들로 세상을 각성시킨 혁명가였던 것이다.

웨일러스의 멤버로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밥 말리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마침내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에게 공연의 오프닝을 맡긴 롤링 스톤스(당시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는 항상 밥 말리의 아이콘적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와 그의 노래 '아이 샷 더 셰리프'를 커버해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린 에릭 클랩턴의 외적 조력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노 우먼 노 크라이'의 성공이었다. 1974년 앨범 <내티 드레드>의 수록곡으로 처음 발표되었던 이 노래는 이듬해 7월 벌어진 전설적인 런던 라이시엄 극장 공연의 실황 녹음으로 최상의 격찬을 받았다.

'노 우먼 노 크라이'는 밥 말리가 트렌치타운에서 보낸 과거를 회상하며 만든 노래다. "우리가 가진 좋은 친구들과 우리가 잃은 좋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 위대한 미래에도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서글프지만 결연한 외유내강의 진혼곡이다. 말리는 이 노래의 저작권을, 기타 연주를 가르쳐준 멘토이자 거처를 제공해준 은인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필생의 친구였던, 빈센트 포드에게 줌으로써 곤궁한 시기의 기억을 스스로 보상하기도 했다. 인민의 영웅다운 행보였다.

고로, 노래 제목의 의미는 '노 우먼, 노 크라이'(여자가 없으면 울 일도 없다)가 아니라 '노, 우먼, 노 크라이'(여자여 울지 말아요)가 맞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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