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글램 록' 표준을 제시하다

2009. 3. 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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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70] 티렉스의 <겟 잇 온>(1971년)

영국에서 계급성의 문제는 문화의 양상으로 드러나곤 했다. 특히, 대중음악의 소비 행태에 있어 노동자층과 중산층 사이의 긴장감은 복잡한 사회적 요인들과 겹쳐 갖가지 청소년 하위 문화의 양상을 만들어냈다. 사회학자이자 비평가인 사이먼 프리스가 "또래 집단들을 서로 구분하는 수단으로서 음악은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언제나 특별히 중요했다"고 쓴 배경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드'족과 '로커'족으로 양분됐던 1960년대 영국 청소년문화의 판도는 1970년대로 접어들어 더욱 세분화한 동시에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했다고 볼 것이다. 글램(화려함을 추구하던 당대 유행)은 70년대의 모드였고, 로커였던 동시에 그들과 다른 무엇이었다.

음악학자 캐서린 찰튼은 글램 록의 유행이 "어떤 측면에서는 60년대 록 음악과 카운터컬처(비주류 문화)에 대한 반작용이었지만, 또다른 측면에서는 그런 문화의 확장이기도 했다"고 평했다. 우선, 글램 록은 외양에서 먼저 차별성을 드러낸 유행이었다는 점에서 모드의 극단적 연장선상에 있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복장을 차려 입은, 중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섹슈얼리티의 외양을 한 뮤지션들이 유행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글램 록은 1950년대 로커빌리의 영향을 흡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음악적으로 로커의 취향과도 상통했다. 글램 록은 모드족과 로커족의 문화 사이에 이종교배로 낳은 당대 대중문화의 사생아였고, 전적으로 영국적인 현상이었다.

글램 록이 70년대 초반 영국의 가장 첨예한 유행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마크 볼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이키델릭풍의 포크 듀오 티래너소러스 렉스의 일원으로 60년대를 보낸 그는 밴드의 이름을 티렉스로 축약하고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와 번쩍이는 메이크업을 덧입음으로써 글램 록의 창시자로 거듭났다. 티렉스의 리더로서 데뷔 싱글 '라이드 어 화이트 스완'과 뒤이은 '핫 러브'를 연이어 영국 차트 정상에 올린 그는, 마침내 '겟 잇 온'을 통해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비평가 필립 오스랜더가 "티렉스터시(티렉스+엑스터시)는 새로운 비틀마니아"라고 평했던, 거대한 스타덤이었다.

'겟 잇 온'(미국에서는 같은 제목이 붙은 다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해 '뱅 어 공(겟 잇 온)'으로 소개됐다)은 명쾌한 부기 리듬과 단순한 기타 리프로 순식간에 대중의 귀를 잡아끌었다. 실험적 대작들을 쏟아내던 당대 밴드들과 달리, 티렉스는 로큰롤의 원초적 스타일을 세련된 프로덕션에 담아내면서 팝과 록의 미덕을 한 번에 포착해냈다. 심하게 일그러진 퍼즈 기타와 유혹적인 속삭임이 전면에 나선 글램 록 사운드의 표준을 제시한 것이었다.

마크 볼런의 티렉스는 또다른 슈퍼스타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70년대 전반의 영국 대중문화를 규정한 아이콘이었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그들 간의 차이를 히피 문화에 영향을 받은 볼런의 "플라워 파워풍 시적 영감"과 배우 출신인 데이비드 보위의 "웨스트엔드 식 극적 연출"로 구분한 바 있지만, 그 둘 모두가 기본적으로는 "영국 스타일"이라고 전제했다. 미국에서 글램은 록 밴드 키스의 분장 두께만도 못한 소재였으니까.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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