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목사의 꿈' 음악적 증폭

2009. 3. 1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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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69]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패밀리 어페어>(1971년)

1963년 8월 '워싱턴 행진' 연설에서 "나의 어린 자식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의 함량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고 염원했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은 그러나, 애당초 실현의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연설을 행한 때로부터 채 5년도 지나기 전에 킹 목사가 암살당했고, 그 죽음의 여파가 거대한 혼란의 후폭풍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인종 폭동이 도처에서 발생했고 블랙 팬서와 같은 과격 단체가 세를 불렸다. 그것은 60년대의 이상에 대한 사망 판정에 다름 아니었다. 밴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하 패밀리 스톤)의 등장이 일견 경이롭게까지 비쳤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패밀리 스톤은 무엇보다 흑백의 인종 경계와 남녀 성별의 장벽을 동시에 무너뜨린 최초의 메이저 밴드였다. 흑인 남성 셋을 중심으로 두 명의 백인과 두 명의 여성이 7인조 편성을 이룬, 전례 없는 라인업이었다. 밴드를 '가족'으로 명명한 의도에 값하는 파격이었다. 그런 열린 태도는 노랫말에서도 드러났다. 날 선 공방이 횡행하던 시대에 평등과 공존의 보편적 가치를 호소하는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그들의 인기가 1968년 하반기부터 급상승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가 당시 그들의 히트곡들을 가리켜 "워싱턴 행진의 선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새로움은 음악적인 면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카리스마적 리더였던 슬라이 스톤은 당대 흑인 솔 음악의 전형성에 머무르지 않고 백인 록 음악의 장점까지 모조리 흡수한 새로운 사운드를 디자인해냈다. 그래서 비평가 리키 빈센트는 당대 흑인음악에 가장 거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슬라이 스톤을 제임스 브라운과 나란히 거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제임스 브라운이 흑인 게토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확립했던 반면, 슬라이 스톤은 인종 용광로 안에 놓인 모든 이를 대표했다"고 덧붙였다. 그들의 음악에 나타난 통합적 특성의 혁신을 평가한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펑크가 그로부터 탄생했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패밀리 스톤의 후기 대표작 '패밀리 어페어'는 그 극단적 진화상이었다.

마빈 게이의 걸작 <와츠 고잉 온>에 대한 슬라이 스톤의 응답 격인 앨범 <데어스 라이엇 고잉 온>의 수록곡이라는 점에서 드러나듯, '패밀리 어페어'는 음악적 형식과 내용에서 공히 폭동을 작정한 실험을 담지하고 있었다. 기존 솔 음악의 어법은 물론이고, 패밀리 스톤을 스타덤에 올려준 경쾌한 리듬과 명쾌한 가사의 조합도 송두리째 뒤집어버렸던 것이다. 혼자 완성하다시피 한 이 노래에서 슬라이 스톤은 드럼머신 리듬과 반복 녹음을 통한 구성으로 펑크의 방법론을 다시 쓰는 한편,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목소리로 모호한 윤리적 가치를 읊조림으로써 시대적 불화를 온몸으로 은유했다. 비평가 존 랜도의 말마따나 "한 개인의 영혼에 내재한 혼란스러움을 넘어서는 어떤 폭동의 진행형"을 담아냈던 것이다.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변용해 증폭시킨 음악적 최대치였다.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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