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보-스캔들 사이에 핀 '기타 예술'

2009. 2. 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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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65] 데릭 앤 더 도미노스의 <레일라>(1970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닉 혼비의 소설 <하이 피델리티>에서 중고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공은 실패로 얼룩진 자신의 연애사를 떠올리며 이렇게 푸념한다. "내가 비참했기 때문에 팝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팝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비참했던 것일까?"

음악광인 자신이 사랑의 낙오자로 남은 현실을, "수많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노래들이 상심, 실연, 고통, 비참, 상실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 빗대 자조한 것이다. 그럴 법도 하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의 대다수가 사랑을 주제 삼은 변주니까.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실패한 사랑에 관한 것이니까. 지난 2004년,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은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500곡을 선정한 바 있다. 조사 결과 그 노래들의 제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낱말은 '러브/러빙'인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 43곡이었다. 다음으로 즐겨 사용된 단어인 '록/로킹'과 '베이브/베이비'가 각각 8곡씩이었으니 현격한 빈도차다. 게다가 제목에서 직접적으로 '사랑'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종국적으로는 '사랑 얘기'라고 할 작품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역사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증명해 온바, 인간사의 흉금과 정리를 농축한 화두로서 사랑보다 높고 넓은 가치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러니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랑 노래"라는 별칭이 얼마나 대단한 찬사인지 논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데릭 앤 더 도미노스의 '레일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데릭 앤 더 도미노스는 70년대와 함께 시작된 에릭 클랩턴의 새로운 프로젝트였고, '레일라'는 그들의 유일한 정규 앨범이자 대중음악사의 걸작으로 남은 <레일라 앤 어더 어소티드 러브 송스>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노래는 에릭 클랩턴이 순애보와 스캔들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던 자신의 사랑 얘기를 토로한 것이라는 사실로 유명해졌다. 친우 조지 해리슨(비틀스)의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에게 일방적으로 사로잡힌 클랩턴은 '금지된 사랑'의 늪에 속절없이 빠져든 대가를 절망과 비탄으로 치르고 있었고, '레일라'는 그가 7세기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레일라와 마즈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결과물이었다. 여느 사랑 노래들과는 다른 이 노래의 활화산 같은 격정은 결국, 응축된 연정의 분출인 셈이다. 물론, '레일라'에는 호사적 배경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격렬한 전반부와 수려한 후반부가 양립하는 대칭적 악곡 구조는 오늘날에도 독특한 신선함을 풍기는데, 특히, 확장된 코다 형식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인스트루멘털은 일렉트릭 기타의 명연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여기서 협연자로 나선 슬라이드 기타의 명인 드웨인 올먼은 에릭 클랩턴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선율을 펼쳐내기도 했다.

'레일라'는 사랑에 눈먼 남자의 상심과 비참이 예술적 성취로 승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 덕분이었을까? 1979년 클랩턴은 마침내 패티 보이드의 사랑을 쟁취해냈다. 초콜릿 따위로 밸런타인데이를 허비하는 시대에선 상상하기 힘든, 동화 같은 사랑 얘기의 귀결이다.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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