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음악+ 록'의 호황시대를 열다

2008. 12. 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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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54 프로콜 하럼의 <어 화이터 셰이드 오브 페일>(1967년)

현대 음악과 대중 음악의 접경에서 독창적 일가를 이룬 거인이자 기인이었던 프랭크 자파는 "예술이란 별게 아닌 것으로부터 뭔가 있는 것을 만들어 팔아먹는 일"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그것은 "돈 되는 사업이야말로 최선의 예술"이라 했던 앤디 워홀과 "예술은 사기"라고 했던 백남준의 견해를 뒤섞어 1960년대란 시공간에 적용한 결과로 얻어낸 명제처럼 보인다. 이상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뒤엉켜 사이키델릭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특이한 해프닝이 주류 문화의 양상을 뒤집는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던 시절의 이면이다.

'프로콜 하럼'이라는 독해 불가의 기묘한 이름을 가진 밴드가 피상적 서술의 노랫말과 유명한 고전 음악의 선율을 짜깁기하여 완성시킨 <어 화이터 셰이드 오브 페일>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비평가 지안카를로 수재너의 표현처럼 "1967년 '사랑의 여름'에 안성맞춤인 레코드"였다. 무명이던 프로콜 하럼을 단숨에 세계적 스타덤에 올려놓은 이 노래는 '사랑의 여름'이 그랬던 것처럼 우연한 폭발이었고,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 "해프닝처럼 들렸던" 것이다.

프로콜 하럼은 1967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다. 리듬 앤 블루스 밴드 출신의 보컬리스트 개리 브루커와 가사를 전담하는(그러나 연주는 하지 않는) 멤버 키스 리드가 주축이었다. 두 사람은 밴드의 이름을 정하기도 전에 함께 곡 만들기를 시작했는데, 그 최초의 산출물이 바로 <어 화이터 셰이드…>였다. 시작부터 유별난 곡이었다.

<어 화이터 셰이드…>는 바흐의 칸타타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와 관현악곡 <g상의 아리아>에서 주선율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먼드 오르간의 아련한 사운드와 몽환적 연주로 풀어내어 단번에 청자의 귀를 낚아챘다. 게다가 수수께끼 같은 노랫말로 거기에 신비주의를 도금했다. "해변을 떠나던 베스타의 여사제들"이라거나 "넵튠을 속여 넘긴 인어 아가씨" 따위의 추상적 구절들이 영국 속어로 '만취상태'를 가리키는 노래 제목과 어울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60년대 말 사이키델릭의 아이들이 <어 화이터 셰이드…>에 열광했던 것은 일견 당연하기까지 하다. 이 노래는 영국 차트 정상을 석권한 데 이어 빌보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어 화이터 셰이드…>는 사이키델릭의 노블티(유행상품)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정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고전 음악과의 크로스오버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음으로써 대중 음악 지형도에 프로그레시브 록 사운드의 발원을 그려 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음악전문지 <롤링 스톤>은 이 노래가 "무디 블루스에게 세상을 안겨준 (프로그레시브 록의 한 지류인) 클래시컬 록의 호황 시대 개막에 일조했다"고 평했다. 같은 레이블(데럼) 소속이던 무디 블루스가 <나이츠 인 화이트 새틴>으로 혜성처럼 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는 것이다. <어 화이터 셰이드…>의 의도하지 않은 도발이 결과적으로 대중 음악사를 바꾼 단초가 되었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로큰롤은 태생부터가 그랬다.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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