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 록 낳은 현실주의적 음악 실험

입력 2008. 11. 25. 19:47 수정 2008. 11. 2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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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53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헤로인>(1967)

"누구나 15분 동안 세계적 유명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인물답게,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주변은 인기와 명성을 꿈꾸는 이들로 넘쳐났다. 워홀은 그들을 '슈퍼스타'라고 부르며 자신의 '공장'(팩토리)에서 함께 작업했다. 그로부터 워홀은 장미셸 바스키아나 줄리언 슈너벨처럼 반짝이는 재능의 원석들을 세공해냈는가 하면, 에디 세즈윅이나 발레리 솔라나스처럼 비참한 운명의 노예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더불어 그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같은 이례적인 산물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다. 슈퍼스타가 되기를 거부한 슈퍼스타였던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시대성을 탈피한 시대성으로 세상에 홀로 선 독보적 존재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 후반을 휩쓴 문화적 열쇳말은 사이키델릭이었고, 67년은 그 열풍이 절정에 이른 시점이었다.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필두로, 도어스와 지미 헨드릭스의 데뷔작,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서리얼리스틱 필로우'와 러브의 '포에버 체인지스' 등 걸작들이 대중문화의 표정을 결정하던 당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모든 기존성과 단절하는 방식으로 로큰롤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거리의 시인을 자임한 싱어송라이터 루 리드와 고전 음악을 전공하고 현대 음악의 세례를 받은 '레너드 번스타인 장학생' 존 케일을 축으로 하는 멤버 구성부터가 미증유였다. 거기에 앤디 워홀의 재정적 도움과 창작적 간섭이 얽히면서 저 유명한 노란 바나나 표지의 데뷔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의 특이점이 완성되었다. 요컨대, '헤로인'은 앨범의 그 같은 성격을 대변하는 집약판이다.

'헤로인'은 65년 제작한 데모 테이프에도 수록된,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만든 최초의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7분이 넘는 연주시간 동안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이 노래는 로큰롤의 작법 자체를 거부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끊임없이 신경을 거스르는 케일의 일렉트릭 비올라와 시종일관 무신경한 리드의 읊조림은 모린 터커의 기괴한 드럼 연주를 타고 청자의 귀를 교란한다. 약물을 내세운 타이틀과 그것의 증후를 묘사하는 노랫말은 얼핏 사이키델릭 록의 전형을 따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점으로 한 사이키델릭 록이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의 도피처였던 반면, 뉴욕을 배경으로 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지성적 현실주의자들의 전위였던 것이다.

'헤로인'은 흔한 오해처럼, 약물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약물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60년대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그것의 실재를 현상적으로 바라본 냉정한 시각이었다. 그래서 비평가 클린턴 헤일린은 "'헤로인'의 비참한 정서는 철저한 사실성에 있다"고 지적했고, 그런 측면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가장 심중한 의미로서의 포크 음악 창작자"라고 했던 웨인 맥과이어의 견해도 힘을 얻는다.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실제 거리의 삶에 부합하는 눈높이로 포착해냈다는 말이다. "펑크 록과 얼터너티브 록의 원조"로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영향력은 그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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