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지2010]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의 황영희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기자 = 아무래도 그는 평생 배우만 하고 살 것 같습니다. 인터뷰 도중에 그는 "잠시 흔들렸어요."라는 말을 몇 차례 했습니다. 연극배우의 길에서 잠깐잠깐씩 비켜섰던 때를 회상하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잠시 흔들렸을 때'는 배우생활 하는 것 보다는 아무래도 몸도 편안하고 수입도 좀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황영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배우의 길을 걸어옵니다.
전남 목포의 정명여고 시절 극단 선창 등 연극판을 기웃거리던 때 이래 지난 20여년 간 배우로서 그의 이름이 그렇다고 그리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닙니다. TV드라마 < 베토벤 바이러스 > 를 보던 사람에게 '황영희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잘 모릅니다. 연극 구경을 곧잘 다니는 사람에게 황영희에 대해 물어도 비슷한 반응이 나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의 반응 속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거 < 베토벤 바이러스 > 에서 박혁권 부인 역으로 나오는 배우 말이야..." 또는 " < 경숙이, 경숙아버지 > 에서 아배 애인 자야 역 맡았던 그 배우 말이야..."라고 단서를 주면 사람들은 펀뜩 황영희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리고는 "아, 그 배우!... 연기 잘하던데..."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요즘 그는 연극열전 2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 민들레 바람되어 > (박춘근 작.김낙형 연출)에서 거의 늘 그래왔듯 조역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한 때 인물 값을 하면서 바람만 피우다 마음을 바로잡은 남편을 둔 할머니 역이지요. < 민들레 바람되어 > 는 은행원 안중기와 세상을 일찍 떠난 부인 오지영 간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작품입니다. 극의 후반부에 객석 이곳저곳에서 관객들의 훌쩍이는 소리를 듣게 되는, 멜로드라마적 요소도 있는 연극이지요.
황영희는 극의 중간중간에 남편 역과 함께 슬그머니 나왔다 들어가며 애절함의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황영희가 전라도 사투리로 남편을 흉보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나중에 알았는데 이 노래(Amazing Grace)로 (이 영감탱이가) 여자들을 수 없이 꼬셨대. 지는 이 게 팝송인줄 알고 불렀겠지. 어떻게 찬송가로 계집들을 꼬시냐?"
< 돌아온 엄사장 > (박근형 작.연출)에서의 황마담이나 < 경숙이, 경숙아버지 > (박근형 작.연출)에서의 아배 애인 역시 비슷한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극중 역할이 잠깐잠깐 나와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며 웃음꽃을 살리는 것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 백무동에서 > (박근형 작.연출)의 경우 주변의 모든 뒤틀어진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수간호사 역으로, < 남도 > (박상륭 작.박정석 연출)에서는 손자를 떠나지 않게 하려고 손자의 눈을 멀게 하는 충격적인 할머니 역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 < 남도 > 출연 때는 정말 미쳐서 해 낸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주 힘든 역할을 하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더라구요. 보통 (박)근형선생님하고 했던 것들이 괴로우면서도 하고 나면 즐거워요."
황영희는 직업배우를 목적으로 서울에 완전히 올라온 후 극단 성좌에서 3년간 생활한 후 2000년 < 대대손손 > (박근형 작.연출)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얼마 안 있어 박연출의 극단 골목길에 합류합니다. 이어 < 선착장에서 > , < 삽 아니면 도끼 > 등 박연출 작품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황영희는 목포 사람이지만 전라도 사투리 외에 경상도 사투리에도 능하다는 것입니다. < 경숙이, 경숙아버지 > 나 < 돌아온 엄사장 > 에서는 천연덕스럽게 경상도 사투리를 해 댑니다.
"영화 < 아이스케키 > 에 출연중인 신애라씨에게 전라도 사투리 지도를 하기도 했어요. 전라도야 제 고향이니까요... 경상도 사투리는 < 선착장에서 > 를 하면서 극단에 있는 대구 출신 배우 권방현씨에게서 배웠는데 제가 언어 쪽으로 감각이 좀 있는 모양이예요. 그래서 < 돌아온 엄사장 > 할 때는 근형선생님이 하라고 해서 고수에게 경상도 사투리를 가르쳤어요."
황영희는 배우생활을 하면서는 한 때 생활고로, 또 빚에 몰려 죽고 싶을 정도까지 갔다고 합니다. 남산 하이야트 호텔의 고급 일식당에서 근무할 때는 팀장으로부터 일을 잘 하면 유학을 보내줄 수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합니다. 일없이 놀고 있던 때 아는 분의 권유로 아르바이트 부동산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했던 큰 돈을 벌어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그는 흔들렸습니다.
큰 명성을 얻지 못한 연극배우의 수입이라는 게 너무 적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얼마 전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사장 박정자)이 직업 연극인 1천5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연극활동을 통해 얻는 배우들의 평균수입이 얼마나 적은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않은 길을 흔들릴 때 마다 추스르고 다시 걸어가는 황영희를 비롯한 많은 연극배우들의 용기에 마음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 민들레 바람되어 > = 지난해말부터 시작된 연극열전 2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신예작가 박춘근의 창작극으로 김낙형이 연출했다. 공연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2009년 1월4일까지. 남편인 은행원 안중기 역:조재현.이승준(더블캐스팅). 일찍 죽은 부인 오지영 역:이지하. 할머니 역:황영희. 바람만 피우다가 부인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정신을 차리고 부인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할아버지 역:이한위.김상규(더블캐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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