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저항보다 더 통절한 '고뇌의 노래'

2008. 11. 1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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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52 오티스 레딩의 <더 독 오브 더 베이>(1968)

제시카 랭과 할리 베리가 눈물의 호연을 펼친 영화 <루징 아이제이어>(1995)는 백인 가정에 입양된 흑인 아기의 양육 문제를 매개로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10살 남짓한 백인 누이 한나가 피부색이 다른 의붓동생 아이제이어에게 묻는다. "내 손과 네 손이 어떻게 다르지?" 동생이 답한다. "내 손이 좀 작네."

그 짧은 대화를 통해서 영화는 색깔에 먼저 반응했던 관객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든다. 인종차별이란 선천적으로 발현되는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편견이라는 사실을, 때묻지 않은 동심의 눈으로 투영한 것이다. 세속에 물든 어른들의 '스코토마'(편견에 눈멀어 자명한 사실을 보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에 대한 폭로다.

인종적 스코토마는 흑인 가수에 대한 백인 관객의 시각을 규정한 요인이기도 했다. 로큰롤에 대한 억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던 그것은 시간을 거치며 완화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치유되지는 않았다. 요컨대, '말초적인 엔터테이너로서의 흑인성'의 고착화다. 벌거벗은 감정을 드러내는 동물적 본능은 흑인만의 특질이라는 편견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흑인 가수들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다. 백인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흑인 가수들의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뮤지션 조니 오티스의 다음과 같은 냉소가 증언하는 바도 그것이다.

"블루스 혹은 블루스적인 것을 연주하면 그들(백인 관객)을 놓쳤다. 하지만 아주 활기찬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면 그들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리듬 앤 블루스를 '겉핥기'로 연주하면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비평가 브라이언 워드는, 그 결과로 "흰둥이에게 몸 팔기"가 흑인 음악의 오랜 전통처럼 비쳐졌다고 썼다. 오티스 레딩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솔 보컬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오티스 레딩은 60년대 중후반 흑인 가수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원초적 에너지와 폭발하는 감성을 동시에 갖춘 그는 백인 관객이 원하는 흑인 쇼맨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브라이언 워드는 그런 관점에서 "오티스 레딩이 1967년 사망 당시 백인 관객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는 사실은 괄목할 일"이라고 평했다. 죽음마저 쇼맨십의 일부로 받아들인 백인들의 왜곡된 시각을 꼬집은 말이다. 레딩의 유작 <(시팅 온) 더 독 오브 더 베이>가 더욱 서글프게 들리는 이유다.

<더 독 오브 더 베이>는 무엇보다,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오티스 레딩을 '마침내'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흑인에게는 "동틀 무렵의 제방에 앉아" 삶을 반추하는 일조차 사치스럽다고 간주하던 시대의 그늘이, 레딩의 절제(함으로서 더욱 큰 울림이)된 음정 사이에 스며 있다. 솔 음악의 아이콘이었던 그의 번민은 당대 모든 흑인 가수들의 딜레마를 대변한다. <더 독 오브 더 베이>의 호소가 직접적인 저항의 노래보다 더욱 통절한 이유다. 하지만 그것은 피부색에 관한 한 색맹이 되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은현 메시지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인종에 우선한다는 자명한 진리가 쓰여 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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