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키델릭으로 '인식의 문' 활짝

2008. 10. 2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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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48 도어스의 <라이트 마이 파이어>(1967년)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1954년 펴낸 저서 <인식의 문>에서,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이 인간의 의식세계를 확장시켜 "충만한 정신"(마인드 앳 라지)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헉슬리는 "인식의 문들이 정화되면 만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라고 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자유롭게 '인식의 문'(도어스 오브 퍼셉션)을 넘나든 블레이크처럼, 약물의 도움을 통해 보통 사람들도 그와 같은 정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사부터가 '환각적'인 사이키델릭의 시대에 어느 밴드가 스스로를 '인식의 문'으로 자청한들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사이키델릭은 60년대 후반 미국 사회의 표정이었다. 반전과 인권운동이 상징하는 현실비판적 태도, 비트 문학과 실존주의와 동양 철학이 공급한 이론적 배경, 자유 연애와 자연 회귀의 삶의 방식 등이 약물을 매개로 뒤엉켜 파생한 복잡한 성격의 하위문화였다. 온갖 진보적인 인식의 실험장이었던 60년대의 산물인 것이다. '사이키델릭 록' 혹은 '애시드 록'은 당대의 사운드트랙이었다.

헉슬리의 <인식의 문>으로부터 이름을 차용한 밴드 도어스는 사이키델릭의 60년대가 낳은 스타였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사이키델릭했다. 비트 시인과 교유했던 짐 모리슨과 대학의 초월 명상 수업에서 만난 다른 세 멤버 로비 크리거, 레이 맨저렉, 존 덴스모어의 연결 고리부터가 그랬다. 팝 음악의 명료한 선율과 어둡고 관능적인 태도 사이에 위치한 도어스의 음악 또한 사이키델릭의 극단적 절충주의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도어스는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애시베리를 거점으로 했던 동시대의 주류와는 거리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클럽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에 이미 일탈적인 행동과 파괴적인 에너지로 여타의 '꽃의 자식들'(플라워 칠드런)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시킨 상태였다. 말하자면 도어스는 절충주의의 또다른 절충이었던 셈이다. <라이트 마이 파이어>를 탄생시킨 특질이었다.

로비 크리거의 곡과 짐 모리슨의 글이 만난 <라이트 마이 파이어>는 마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던 존재들간의 우연한 충돌이 점화한 화염 같은 것이었다. 경쾌하고 선명한 오르간과 대화를 시도하는 듯한 인상의 기타가 펼치는 최면적인 연주 위로, 짐 모리슨의 바리톤이 노골적인 성적 도발을 외친다. 그것은 이질적인 조합이었던 만큼이나 낯선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빌보드 차트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대중문화잡지 <롤링 스톤>이 "사춘기 소녀들을 사로잡은 모든 반우상(안티-아이콘)의 원조"라고 평한 짐 모리슨의 존재감 덕이었다.

짐 모리슨은 스스로를 "에로틱한 정치가"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성공작이었던 <라이트 마이 파이어>는 모리슨과 그의 밴드가 대중 정치의 소통을 시작한 지점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60년대 후반의 사이키델릭 하위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인식의 문'으로 남았다.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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