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연주·음향의 '일렉트릭 혁명'

2008. 10. 1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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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47 지미 헨드릭스의 <퍼플 헤이즈> (1967년)

기타는 오늘날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악기로 꼽힌다. 하지만 전체 음악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위상은 극히 최근에야 정립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작은 오케스트라"라는 베토벤의 찬사처럼 뛰어난 기능성에도 불구하고, 기타는 작은 음량으로 쓰임새가 제한된 실용성 때문에 오랜 세월 변방의 악기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계기는 전기 장치들의 발명이었다. 마이크와 앰프를 통해 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게 되면서 기타의 잠재력이 음악의 혁신과 맞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는 대중음악의 핵심적 악기로 자리잡았고, 그것의 음악적 가능성은 록 음악을 통해 만개했다.

머디 워터스를 위시한 시카고 블루스 연주자들로부터 시작된 일렉트릭 기타의 르네상스는 1960년대 영국의 젊은 뮤지션들을 통해 정점에 다다랐다. 미국의 흑인 음악을 모방하던 그들은 독자적인 블루스 록의 기틀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렉트릭 기타의 연주 기법과 사운드 프로덕션에 혁명적 발전을 가져왔다. 에릭 클랩튼, 제프 벡, 그리고 훗날 '레드 제플린'을 결성하는 지미 페이지 등이 서로 자극하고 경쟁하는 속에서 획득한 성취였다. 미국인 지미 헨드릭스가 영국에서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배경도 거기 있다.

지미 헨드릭스(1942~1970)는 록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에게 바쳐진 무수한 헌사들이 증거다. 시사주간 <타임>은 헨드릭스가 "일렉트릭 기타의 음향적 가능성을 재정립하고 확장시켰다"고 썼고, 음악방송 '브이에이치1'은 그의 연주가 "일렉트릭 기타의 마력에 대한,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하고 영향력 있는 시연이었다"고 했다. 동료 연주자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에릭 클랩튼은 그를 질투하면서도 존경했고, 그룹 '후'의 피트 타운센드는 "질투하지 않았다. 근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얘기한 바 있다. 27살에 요절할 때까지 (리틀 리처드 등의 반주자로 전전했던 기간을 빼고는) 불과 3년 동안 활동했을 뿐인 인물에 대한 평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퍼플 헤이즈>는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혁명을 알린 일성이었다. 그것은 블루스에 바탕하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노래였고, 당대의 연주 기법과 음향 실험을 전대미문의 음악 형식으로 일체화시킨 연주였다. 데뷔작 <헤이 조>가 다른 가수의 커버곡이었던 반면, 두 번째 싱글이던 <퍼플 헤이즈>는 헨드릭스의 창작곡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달리한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지 <큐>는 2005년 이 노래를 "가장 위대한 기타 연주"로 선정했고, <롤링 스톤>은 올 6월 비슷한 기사에서 척 베리의 <조니 비 굿>에 이은 두 번째 순위에 이 곡을 올려놓았다.

<퍼플 헤이즈>의 혁신은 대중음악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1967년 3월 영국에서 먼저 발표되어 하드 록의 탄생 분위기를 조성했고, 3개월 뒤 미국에서 열린 '몬터레이 페스티벌'을 통해서는 사이키델릭 반문화의 싹을 틔웠던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와 록 음악의 역사를 바꾼 기점이었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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