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풍미한 변혁의 역설

2008. 9. 1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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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43. 롤링 스톤스의 <(아이 캔트 겟 노) 새티스팩션>(1965년)

로큰롤이 청소년들의 열광 속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반백 년 세월을 넘겨 생존해나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청소년 비행이 일으킨 반항적인 악취미의 일시적 유행에 불과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롤링 스톤스가 블루스 리바이벌 붐을 타고 데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로큰롤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시사지 <라이프>가 '록 음악의 탄생'을 "지난 천 년의 100대 사건"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을 만큼 인식이 바뀐 세상에서, 롤링 스톤스는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금언을 입증하는 상징적 존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 같은 사실은 롤링 스톤스에게 새삼스러운 의미를 갖는다. '이유 없는 반항'과 거침없는 일탈을 록 음악의 이미지로 영원히 고정시킨 사람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위시한 초창기 스타들이 단지 로큰롤을 연주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데 반해, 롤링 스톤스는 애초부터 반사회적인 태도로 로큰롤을 연주하기로 작정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지 <멜로디 메이커>는 1964년 3월14일치에 "당신의 누이를 롤링 스톤스와 어울리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롤링 스톤스의 거칠고 불량한 태도가 전략적으로 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비틀스의 네메시스가 되기를 자임했다. 비틀스의 친근하고 붙임성 있는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역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위악적인 태도가 궁극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든 동력은 음악적 성취였다. 그리고 <(아이 캔트 겟 노) 새티스팩션>은 이를테면, 그 방점이었다.

<새티스팩션>은 롤링 스톤스를 진정한 스타덤에 올린 노래였다. 그래서 뒷날 믹 재거는 이 곡이 "현재의 롤링 스톤스를 만들었다"며 "그저 그런 밴드 중 하나였던 우리를 거대한 괴물로 변화시켰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음악적 성과는 더욱 두드러졌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는 그들이 "<새티스팩션> 이후 모방자라는 혐의로부터 벗어났다"고 평한 바 있다. 블루스를 흉내내던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향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비평가 데이브 마시가 "척 베리의 <조니 비 굿> 이래 로큰롤 역사상 가장 훌륭한 리프"라고 칭한 키스 리처즈의 기념비적인 기타 연주가 있었다.

더불어, <새티스팩션>은 노래 부르기의 다른 방식을 보여준 센세이션이기도 했다. 신랄하고 신경질적인 믹 재거의 창법은 70년대 말의 펑크 록 밴드들을 십 년 이상 앞선 시연이었다. 미국 사회의 상업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노랫말도 그렇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본가로 등극하는 '록 스타의 패러독스'는 그로부터 정형화하기 시작했다. 변혁의 60년대 한복판에서 롤링 스톤스는 자기모순의 변증법을 통해 혁명조차 사고파는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에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을" 테니까.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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