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혈포크에서 포크록으로

2008. 9. 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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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42. 밥 딜런의 <라이크 어 롤링 스톤>(1965년)

예술가의 변신은 무죄다. 언제나 관건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각적인 충격과 반발을 불렀던 예술적 모험이 때로, 궁극적인 찬사와 호평을 끌어낸 역사적 선택으로 재평가받는 경우도 생긴다. 안온한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대중과 새로운 가치창출을 꿈꾸는 예술가의 눈높이가 어긋날 때, 해결책은 오직 시간뿐이다.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 초연에서 성난 관객들의 폭동으로 난장판이 되었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오늘날 현대음악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 한 예다. 밥 딜런이 일렉트릭 기타를 잡았을 때, 세상이 보인 반응도 그랬다.

1965년 7월25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록 밴드를 대동한 그에게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포크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록의 상업성과 타협했다는 것이다. 이날 밥 딜런은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을 비롯하여 세 곡의 록 넘버를 연주했을 뿐이지만, 그사이 지난 2년 동안 같은 무대에 선 그를 민중의 영웅으로 환대했던 관객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밥 딜런의 변신을 옹호했던 비평가 폴 넬슨은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슬픈 갈림길이었다"고 썼다. 이념이 예술의 뒷덜미를 붙잡았던 것이다. 밥 딜런은 변절자 유다였다.

그러나 시간은 밥 딜런의 편이었다. 페스티벌을 며칠 앞두고 싱글로 발매되었던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은 그로부터 몇 주 후 빌보드 차트 2위, 영국 차트 4위에 올랐다. 딜런의 화려한 경력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절정으로 남은 당시 기록은, 그가 소수 포크 순혈주의자들의 지지를 잃은 대신 다수 음악 애호가들의 열광을 얻었음을 증명한다. 작가 마이크 마쿠시는 그것을 <봄의 제전>에 비견했다. 그러면서도 "스트라빈스키가 원초적인 것을 즐기는 모더니스트 지식인인 반면, 딜런은 모더니스트를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의식적 반지식인에 더 가까웠다"고 덧붙였다. 록은 밥 딜런의 새로운 무기였던 것이다.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은 미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04년 '롤링 스톤'은 로큰롤 탄생 50주년 특집에서 이 곡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로 선정했을 정도다. 포크의 오랜 전통이 포크 록이라는 혁신적 가치로 진화함으로써 록의 음악적 표현 범위를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마이클 그레이는 "포크의 논리 개연성과 록의 남성성 사이의 심원한 결합을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록 음악은 더 이상 청소년 비행의 전유적 배경음악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의 예술적 작업도구였다. 그러한 가치의 전화는 비틀스에서 지미 헨드릭스까지, 동시대의 뮤지션들에게 강렬한 영감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도 거대한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의 말처럼 록을 연주하는 데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변신은 다만 결과물로 말할 뿐이다. 밥 딜런이 누군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다.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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