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음악 새 좌표..미국의 검은 왕

2008. 8. 2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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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

41. 제임스 브라운의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1965년)

1960년대 솔 음악의 전성기를 이끈 원동력은 주로 세 레코드회사로부터 나왔다. 어리사 프랭클린을 배출한 어틀랜틱, 수프림스의 모타운, 그리고 오티스 레딩의 스택스가 그들이다. 서로 경쟁하고 때로 공조하며 세 레이블은 각각의 고유한 사운드를 발전시켰고, 인권운동의 열기와 함께 흑인음악의 인기가 고조되면서 대중적 성공을 누렸다. 믿기 힘든 것은, 달콤한 성공의 열매가 정작 그 주인공인 흑인 뮤지션들에게는 가져다준 게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백인 중심의 시스템이 음악산업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브라운은 그런 현실과 맞선 끝에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흑인 뮤지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평가 넬슨 조지의 말로 "혼자만의 힘으로 흑인음악이 제공할 수 있는 예술적 자유와 경제적 자립의 가능성을 증명해낸" 인물이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솔의 대부', '펑크의 제왕', '디스코와 힙합의 가능성을 제시한 혁신가' 등 다양한 애칭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거대한 음악적 영향력의 범위를 짐작게 하는 수사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딱 떨어지게 브라운을 소개하는 별명은 '연예산업계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것이다. 밴드와 함께 1년에 300회가 넘는 공연을 치러내곤 했던 육체적 에너지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자신을 채찍질했던 정신적 강인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백인 레코드사와 매니저의 통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관리했던 자존적 태도, 흑인의 인권과 빈자의 소외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사회참여적 의식을 빼고 제임스 브라운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흑인 소유 기업으로 드물게 높은 성과를 올린 모타운이 백인 청중이 떠날 것을 우려해 현실을 회피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넬슨 조지는 "모타운은 아마 젊은 미국의 사운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임스 브라운은 분명 검은 미국의 왕이었다"고 평했던 것이다.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은 제임스 브라운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개인사적 의미와 최초의 펑크 히트곡으로 꼽히는 음악사적 가치를 동시에 얻은 노래다. 여기서 브라운은 두툼한 관악부와 찰랑거리는 일렉트릭 기타를 바탕으로 강력한 리듬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독자적인 사운드를 세웠다. 결과적으로 솔을 재확립하고, 펑크를 발명하는 동시에, 디스코와 힙합에 영감을 준 스타일이었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가 "팝 음악의 조합에서 리듬을 최상위의 것으로 밀어 올린 비전과 야심을 가졌던 최초의 뮤지션"이며 "가장 위대한 로큰롤러"라는 찬사를 제임스 브라운에게 바친 근거도 마찬가지다.

제임스 브라운은 흑인음악의 역사를 전과 후로 나누는 일종의 기준이다. 재즈,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의 유산이 그를 거쳐 솔, 펑크, 디스코로 진화했다. 트렌드를 좇은 게 아니라 그것을 낳은 결과였다. 그러고 보면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은 그 모든 변화의 시작을 알린 기준점이었던 셈이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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