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부른 '거대한 성공'

2008. 8. 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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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39. 수프림스의 <베이비 러브>(1964)

모타운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와중에도 타격을 입지 않은 보기 드문 미국의 레코드회사였다. 오히려 더욱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갔다는 점에서는 이변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했다. 모타운의 그런 이례적인 성공은 특유의 시스템에 힘입은 것이었다. 백인 청중을 겨냥한 팝적인 솔을 음악적 특장으로 내세운 것도 그렇지만, 회사 내부의 조직체계가 끈끈한 인적관계로 결속되어 있었다는 점이 더욱 강력한 요인이었다. 관계의 꼭지점에는 물론, 사장이던 베리 고디가 있었다.

베리 고디는, 배우들을 "가축처럼 다뤄야 한다"고 했다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과는 달리, 휘하의 가수들을 가족처럼 연대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소속가수이자 친구인 스모키 로빈슨을 부사장으로 앉혔고, 그의 여동생이자 동업자인 안나 고디는 역시 소속가수였던 마빈 게이와 결혼했다. 회사에 속한 하우스밴드에게는 "펑크(Funk)의 형제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타운은 결혼과 교우로 얽힌 일종의 유사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약한 고리는 있었다. 인기와 성공이라는 목표 아래서, 가수들은 가족인 동시에 상품이기도 했던 때문이다. 레코드 제작과정을 "생산라인"으로, 가수들의 훈련과 통제를 "품질관리"로 칭했던 베리 고디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모타운도 결국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라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수프림스는 바로 그 모타운 시스템의 명암을 가장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준 3인조 소녀 그룹이다. <웨어 디드 아우어 러브 고?>(1964)를 필두로 다섯 곡을 연달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놓은 그들은 60년대에만 열두 곡의 넘버1 싱글을 기록함으로써, 비틀스를 제외하곤 당대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대중적 성취의 금자탑을 쌓았다. 96년 머라이어 캐리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여성으로 가장 많은 1위곡을 보유한 기록도 수프림스의 것이었다.

반면, 그들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드림걸스>(2006)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상업적 성공을 위해 그룹 내부의 유대관계를 희생시켜야 했다는 측면에서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영화와는 달리, 결국 멤버였던 플로렌스 발라드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갈등은 비평가 리치 운터버거의 말마따나 "록 역사상 최악의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간판 격이었던 보컬리스트 다이애나 로스는 유부남이던 베리 고디의 아이를 임신한 대가로, 다른 남자와의 위장(에 가까운)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다. 가족의 해체라는 아이러니였다.

그런 점에서 수프림스 최대의 히트곡이었던 <베이비 러브>는 일종의 분수령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 곡은 빌보드 차트 정상에서 수프림스의 연속적인 히트 퍼레이드를 연계한 핵심적 매개였고, 영국 밴드들이 전세계를 호령하던 당시(64년에서 65년 사이)에 영국 차트를 정복한 유이한 미국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동시에, 모타운과 수프림스의 내부적 갈등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지나치게 거대한 성공이기도 했던 것이다. 밝고 맑은 사랑 노래의 이면에 자리한 어둡고 음습한 운명의 반면교사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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