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음악의 변혁 알린 신호음

2008. 7. 1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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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34. 비틀스의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1963년)

1964년 2월7일, 미국 본토에 대한 영국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첫 공습에 나선 선봉대는 비틀스라고 불리는 네 명의 청년이 전부였다. 교전 따위는 없었다. 오후 1시35분, 뉴욕 케네디 공항에 내린 그들은 자발적인 항복 의사를 표시한 3천명의 환영인파 속으로 무혈 입성했다. 라디오 방송들은 디 데이를 축하하는 특집을 마련했고, 수백명의 기자가 공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법석을 이뤘다.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란 비틀스를 필두로 한 영국 뮤지션들이 미국 음악계를 점령했던 60년대의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침공'이라는 극단적 어휘 선택에 담긴 뉘앙스는 미국인들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오늘날 영국은 미국과 함께 대중음악의 양대 축으로 자연스럽게 간주되지만, 당시로서는 누구도 그런 날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로큰롤은 전적으로 미국 문화의 산물이었고 영국은 일방적인 수입국에 불과했다. 그런 나라로부터 전대미문의 새로운 음악이 창조되었고, 그 음악에 본고장 사람들이 광적으로 호응했으니 경악한 것도 당연하다. 비틀스는 태풍의 눈이었고 지각변동의 진앙이었다.

당시 몇 가지 기록만 살펴봐도 비틀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미국 음악계를 유린했고 초토화시켰는지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도착 이틀 뒤 출연했던 <에드 설리번 쇼>는 미국 방송 역사상 최고기록인 7300만명이 시청했다. 이는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40%, 전체 시청자의 60%에 해당하는 수치다. 빌보드 차트에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 작성되었다. 그해 4월4일치 싱글차트에서 비틀스는 1위부터 5위까지를 휩쓸었다. 100위까지 집계하는 차트 전체에는 무려 14곡이 올라 있었다. 같은 날, 빌보드 앨범차트 1·2위, 영국 싱글차트 1위, 영국 앨범차트 1·2위도 모조리 비틀스의 차지였다.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는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비틀스에게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위 자리를 안겨준 이 노래는 비틀 마니아가 미국 시장마저 접수했음을 알린 최초의 승전보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었다. 전문가들조차도 비틀스의 음악적 독창성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는 비틀스의 음악이 "기본적으로는 로큰롤이다. 덜 정격적이지만 더 창조적이다"라고 에둘러 썼을 뿐이다. 다른 매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음악적 지평을 열게 되리라고 전망한 이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로큰롤은 비틀스를 통해 '록 음악'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아이 원트…>는 그 변혁을 상징하는 신호음으로 기록에 남았다. 소설가 톰 피아자가 <아이 원트…>의 도입부 기타 연주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오프닝, 혹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운명>)의 첫 소절과 비견할"만하다고 평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50년대의 '스테이터스 쿼'(현상 유지)에 머무르던 세계가 비로소 '진짜 60년대'에 진입하기 시작했으니까.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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