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바꾼 '비틀마니아'의 발화점

2008. 7. 1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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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34. 세상을 바꾼 노래 - 비틀스의 <쉬 러브스 유>(1963년)

처음엔 누구도 짐작지 못했다. 현상이 그토록 엄청날 것으론. 비틀마니아(Beatlemania). 문자 그대로 '비틀스 열풍'을 몰고온 그 현상은 상식과 경험의 범주를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 일개 대중음악 가수가 연령, 성별, 계급, 취향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비평가 닉 콘의 지적처럼 "비틀스는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그것은 일종의 경이였다.

비틀마니아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영국 타블로이드 일간지 <데일리 미러>의 1963년 11월11일치 헤드라인을 통해서다. 비틀스가 출연한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다음날이다. 유서 깊은 왕실 자선콘서트의 실황녹화인 그 프로그램을 영국 방송 역사상 최대기록인 1500만명이 시청했다. 콘서트에서 존 레넌은 일생의 가장 유명한 코멘트 가운데 하나를 왕실 가족과 상류 지배층 귀족들이 대거 포진한 객석으로 날렸다. "값싼 좌석에 계신 분들은 박수를 쳐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그저 보석장신구나 짤랑거리세요"라는 냉소였다. 이에 대해 비평가 제임스 밀러는 "관객들은 킥킥거렸고, 언론은 갈채를 보냈으며, 영국 전체가 미소를 지었다"고 썼다.

그것은 대중의 애정에 힘입은 발언인 동시에 대중 정서의 반영이었다.

비틀마니아는, 아직 그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 이미 시대의 공기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비틀스 평전인 <캔트 바이 미 러브>에서 작가 조너선 굴드는 그 같은 대세는 1963년 8월을 기점으로 뚜렷이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쉬 러브스 유>가 발매된 시점이다. 비틀마니아의 본격 발화점이라는 것이다.

비틀스의 네 번째 싱글이었던 <쉬 러브스 유>는 1963년 9월, 영국의 싱글 차트를 평정했다. 이 노래 이전에도 비틀스는 차트 1위 곡을 보유하고 있었다.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발표했던 <플리스 플리스 미>와 <프롬 미 투 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국의 차트들은 아직 단일한 체계로 통합되지 않았고, 그 두 곡은 몇 개의 차트에서 1위에 올랐을 뿐이다. <쉬 러브스 유>는 모든 차트를 정복한 최초의 실질적인 넘버 원 싱글이었고, 영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많이 팔린 레코드로 기록되었다(기록은 폴 매카트니가 1977년 솔로로 발표한 <멀 오브 킨타이어>에 의해 깨졌지만, 이 곡은 아직도 비틀스의 최다판매 싱글이다). 작은 클럽 공연을 중단하고 대형 극장만을 무대로 삼기 시작한 것도 이 노래의 성공 이후 달라진 비틀스의 위상이었다.

비틀마니아는 1960년대 서구사회의 이상과 변혁을 설명하는 축소판이라고 할 만하다.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가.

비틀마니아를 촛불로 치환하면, 그것은 곧 2008년 대한민국의 알레고리가 된다. <쉬 러브스 유>의 발랄과 생기와 신선에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를 대입할 수 있다. 음악은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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