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타운' 퍼레이드의 도화선

2008. 5. 29. 19: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세상을 바꾼노래 26 미러클스의 <숍 어라운드>(1960년)

대중문화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산업도시의 성쇠가 대중문화의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이라고 할 것이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대명사였던 도시 디트로이트의 부침에서 그 단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전성기에 미국 4대 도시로 꼽혔으나 지금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이곳의 과거와 현재는, 록밴드 키스가 활기차게 노래한 <디트로이트 록 시티>(1976)와 래퍼 에미넴이 암울하게 그려낸 <8마일>(2002) 사이에서 거대한 단절면을 드러낸다. 두 작품을 13년 간격으로 반분하는 시점에 서 있는, 쟁점적인 다큐멘터리인 마이클 무어의 데뷔작 <로저와 나>(1989)는 그 간극이 미국 자동차산업의 쇠퇴로 시작된 균열의 여파임을 보여주는 기록인 셈이다. 좋았던 시절의 디트로이트를 상징하는 '모타운'에 대한 해석도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모타운은 전직 권투선수이자 재즈 음반상이었으며 작곡가와 프로듀서로도 활동하던 베리 고디가 1959년 설립한 솔 음악 전문 레이블이다. 모타운은 무엇보다 솔의 감성을 팝의 감각과 결합하여 음악의 인종적 색채를 희석시킴으로써, 흑백 구분 없이 폭넓은 사랑을 받은 독자적 스타일로 유명해졌다. 비평가 리치 운터버거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인지된 레이블은 오직 모타운 하나뿐이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모타운은 하나의 경향이었고 태도였다.

모타운의 성공은 또한 적시적소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로큰롤 1세대의 퇴장과 비틀스의 역사적 미국 상륙(1964) 사이, 트렌드의 공백기에 등장하여 60년대 후반 흑인 인권운동의 절정기에 상한가를 구가한 타이밍이 우선 그렇다. 대표적인 흑인 노동자 밀집지역인데다 거대도시임에도 변변한 지역 기반 레코드사가 없던 디트로이트의 상황 또한 모타운의 발판이었다. '모터 타운', 즉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의 애칭을 축약한 그 이름부터가 태생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미러클스의 <숍 어라운드>는 모타운 최초의 밀리언셀러였다는 점에서 노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빌린 돈 800달러로 회사를 설립한 베리 고디의 미약한 시작을 창대한 성공의 반석에 올려놓은 이 노래는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올랐는데, 모타운이 이후 10년 동안 펼쳐 보이는 98곡 톱텐 히트 퍼레이드의 '기적'을 촉발한 도화선이기도 했던 것이다.

베리 고디는 모타운의 음악을 "디트로이트 사운드"라고 불렀다. 그러나 비평가 찰리 질렛은 어디에도 "딱히 디트로이트적이라고 할 게 없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모타운이 1972년 본사를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 뒤 점차 쇠락해 갔다는 사실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모타운을 60년대 가장 성공적인 독립 음반사이자 한때나마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대의 흑인 기업체로 만든 요인 가운데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이 발전시킨 분업적 생산라인을 음반 제작 공정에 도입한 절충주의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프림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그리고 마이클 잭슨을 '생산해낸' 그 가공할 시스템 말이다.

박은석/대중문화평론가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뢰도 1위' 믿을 수 있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