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음악' 트위스트 열풍의 원조

2008. 5. 2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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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을 바꾼 노래 27 처비 체커의 <더 트위스트><1960년>

대중음악과 유행 춤의 밀월관계는 연원이 오래다. 19세기 말 '찰스턴'의 대유행 이래, 미국의 대중음악은 새로운 춤의 유행을 낳고 다시 그 춤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는 단계를 거치며 시대의 경향을 만들어내곤 했다. 로큰롤과 함께 성장한 50년대의 '합'이 그랬고, 음악 장르와 춤의 형식이 근원적으로 결합한 70년대의 '디스코'가 그랬다. 트위스트는 60년대(특히, 전반부)를 대표하는 율동이자 음악이었다.

트위스트는 파트너 없이 혼자서도 출 수 있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는 춤으로 인기를 누렸다. "엄지발가락으로 담배를 비벼 끄는 동작"이면 족한 단순한 형식도 남녀노소 없이 사랑 받은 요인이었다. 더불어 수많은 관련 음악이 쏟아져 나오며 인기가 끝없이 치솟았는데, 그 유행의 원조이자 열풍의 진앙은 처비 체커의 <더 트위스트>였다. 행크 발라드가 1959년 발표했던 것을 리메이크한 이 노래는 발표 직후인 1960년 9월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1962년 1월에 재차 정상을 밟을 정도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1942)와 함께, 동일한 노래로 2차례 이상 빌보드를 정복한 역사상 단 두 번의 경우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처비 체커와 트위스트의 성공 이면에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도 있었다. 비평가 닉 콘은 트위스트가 본질적으로는 "기껏해야 6개월이면 수명이 다할 3류 유행"이며 "또 다른 훌라후프"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전세계적인 유행으로 웃자랄 수 있었던 것은 "진짜 음악"이 부재한 상황에서 등장한 데다 "미디어의 호들갑"이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더 트위스트>는 막강한 매체권력이 스타와 트렌드의 공백을 파고든 결과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송출한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밴드스탠드>가 그 매개였다. 널찍한 스튜디오에서 청소년들이 인기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방식의 수많은 아류를 낳은 이 프로그램은 당대 가장 강력한 유행전파 매체였는데, 진행자 딕 클락이 배후를 조종했다. 그는 '건전한 청소년 문화'를 구호 삼아, 로큰롤의 파격과 저항을 거세한 유행가를 홍보함으로써 주류 미디어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무기로 음반업계에 개입하여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더 트위스트>는 그가 지분을 소유한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되었고 그의 프로그램을 통해 선전되었다. 심지어 처비 체커라는 예명은 그의 부인이 낸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시사지 <라이프>는 딕 클락을 군복무중이던 엘비스 프레슬리와 대비하여 "독재자는 집에, 제왕은 전장에"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트위스트의 이상열풍과 처비 체커의 과장된 성공은 기성과 미디어의 통제 속에서 산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음악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힘들다. 그러나 비평가 래리 스타의 지적처럼, 그 결과로 파생한 "새로운 춤 문화"와 "유행가를 사회적 바디 랭귀지와 조합시킨" 원형으로서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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