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흙으로 목욕하고 싶구나!

입력 2008. 3. 25. 15:03 수정 2008. 3. 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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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신혜정 기자]

▲ 안녕? 여긴 호주 생태마을 크리스탈워터스예요

ⓒ Alicia Marvin

생태마을 '크리스탈워터스', 생수 이름이 아니구요

'생태마을'이란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이에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으로 지속가능한 삶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재 300개에 달하는 세계 각국의 생태마을은 국제적인 네트워크(GEN:Global Ecovillage Network)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1994년 발기한 GEN은 오세아니아/아시아, 유럽/아프리카, 미주의 3개 지역 사무국으로 구성되어서 각국 생태마을의 운영과 조성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어요.

호주 브리즈번에서 100㎞ 쯤 떨어진 시골에 있는 크리스탈워터스는 GEN의 오세아니아/아시아 지부 사무국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꽤 큰 생태마을이에요. 현재는 80개국에서 온 250여명의 사람들이 터를 잡고 생활하고 있습니다.뭔가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생태마을이라고 해서 유별나게 다른 생활을 하는 건 전혀 아니더라고요. 학생들은 학교 다니고 어른들은 자기 일하고, 그냥 우리나라 시골 마을 같아요. 아니,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거죠. 나무·풀 많고, 주변에 동물이 익숙하게 지나가고, 이웃들은 서로 가깝고.집에서는 가축을 기르기도 하고 자기가 먹을 것들을 정원이나 논밭에 가꾸고, 음식물쓰레기는 쓰레기차에 주는 게 아니라 묵혀두었다가 비료로 쓰고, 변기의 똥오줌도 땅 밑 호스를 통해 흘러나와 비료가 되어주고. 옛날에 조선시대까지는 우리도 자연스럽게 다 했던 건데, 이 사람들은 이제 그 생활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죠.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에 와있어요. 신혜정입니다. 대학교 3학년 마치고 휴학 중이고요. 크리스탈워터스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맥스 린데거 아저씨가 지난해 인터넷을 통해 공지를 띄웠어요. 생태마을에서의 26년간 경험을 머리로 몸으로 전수받고 싶은 전세계의 35살 이하 젊은이들은 모이라고.2008년 3월 15일부터 4개월 동안 너희를 가르치겠다고. 프로그램은 시작됐고 그래서 현재, 저를 포함한 6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어요. 한국·호주·미국·포르투갈·남아프리카의 젊은이들입니다.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인간들이 지구를 망쳐놓은 게 미안해서 지구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긴 한데 뭘 해야 할지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여기에서 뭔가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전문지식이나 경험 같은 거는 쥐뿔도 안 가진 주제에 무작정 뛰어들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첫 번째 목표고요. 영어는 두 번째, 다이어트는 세 번째 목표입니다.
▲ 앞으로 많이 볼 사람들 얼굴부터 보고 시작합시다

크리스탈워터스 창립멤버 맥스와 아내 트루디 그리고 6명의 참가자들. 왼쪽부터 미국 알리샤, 남아프리카 브렌단, 포르투갈 우규, 한국 신혜정과 정성천, 호주 샘.

ⓒ 신혜정

귀머거리 4개월이면 풍월을 읊을 수 있을까

3월 15일 첫날, 크리스탈워터스에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참가자들이 산발적으로 다 모였다. 저녁은 이번 프로그램을 담당할 맥스네서 했다. 트루디가 요리사. 브렌단·우규·알리샤가 채식주의자라서 고기는 자연스레 제외되고, 마늘빵과 삶은 감자·샐러드와 치즈가 여기 와서 먹는 첫 메뉴다.

맛있기는 한데, 생전 처음으로 보는 얼굴들 마주하고 앉으니 저녁 테이블에는 어색한 미소와 침묵이 고요하게 퍼진다. 맥스와 트루디가 테이블 양 끝에 앉아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시작한다. 다행이다 안심하려는데…. 그런데 맥스와 트루디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또다시 식은땀이 흐르려 한다. 다른 애들은 알아듣고 웃고 감탄사를 막 내뱉고 가끔 질문도 하는데, 절망적인 사실은 그 질문도 뭔지 못 알아듣겠다는 것.

"There were many ^!%wqge';laq*&%/.,mnq…. 하하하." "와하하하 원더풀!" "으하하 hwqp4nqq23/. 쏘 그뤠이트r$$%#" "아-하하하하하하."

대충 이런 식이었다. 십수년간 영어 공부한 것이 이런 지경으로 끝맺어지는가. 그렇다고 인상 구기고 있을 수는 또 없어서 하이에나 같은 본능으로 분위기를 감지해 이따금 웃음을 터뜨려준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맥스는 스위스에서 스위스-독일 지방어를 쓰다온지라 독일 억양이 섞여 있고, 트루디는 목소리를 흘리는 유형이다. 샘은 호주 시골 사투리를 쓰고, 우규는 포르투갈 억양이 당연히 있겠지. 그래, 내가 거기까지 욕심낸 건 아냐. 하지만 나름 스탠더드라고 듣기 공부를 했던 영국(브렌단)이랑 미국(알리샤) 말까지 알아듣기 힘들다니….

애들 막 '쥐즈'(geese), '오, 보이'(oh, boy) 이러면서 탄성 내지르는데, 그 가운데서 나는 외롭다. 맞은 편을 힐끔하니 저 쪽에 성천이도 오도카니 치즈 먹고 있다. 그래, 완전 외로운 건 아니구나. 우리 힘내자 성천아. 그런데 왜 눈물이 찔끔 나냐. 흑흑.

▲ 황망했던 저녁, 또한 황망한 사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 신혜정

캥거루는 눈앞에서 배 긁고 앉아있고

다음날 받은 첫 수업은 크리스탈워터스를 둘러본 것. 크리스탈워터스는 78만평 초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전부 둘러보는 건 시간이 많을 때 해야 한다. 일단은 두세 시간 코스로 마을길을 거쳐 주변 열대우림 숲까지 둘러보는 걸 목표로 하고 다같이 떠난다.

어젯밤에 "난 들을 수 있다" 백번 외치고 자고 일어난 데다가 '눈치빨'도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아 어제보다 이해력이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이 풀은 뭔 풀이며 저 나무는 뭔 나무며 맥스가 요리조리 손짓하니 마치 초등학교 아이들 자연 실습 나온 느낌이다.

나무 냄새 풀내음 맡으며 걸으니 기분이 좋다. 새 지저귀는 소리는 어딜 가나 들린다. 개중에는 유리잔이 영롱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있고 고아한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도 있고 미친 원숭이 소리를 내는 것도 있다.

그리고 호주답게 캥거루도 역시 있다! 되게 많다. 캥거루와 캥거루 사촌격인 왈라비도 길가에 자주 등장한다는데 내 눈에는 그냥 다 캥거루로 보인다.

깡충깡충 귀여운 이미지의 캥거루만 상상했는데 나름 근엄하게 배를 긁고 있는 놈들도 있다. 여기 캥거루들은 공격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편이라는데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면 발로 찬댄다. 그래서 만져보고 싶은 거 꾹 참고 사진만 찍었다.

▲ 참새는 짹짹 오리는 꽥꽥

맥스를 따라 크리스탈워터스를 둘러보러 나서다. 쪼끔만.

ⓒ 정성천

▲ 쟤들은 왜 이렇게 단체로 기어나왔어?

               라고 묻는 듯한 캥거루들.

ⓒ Alicia Marvin

도로는 대체로 구불구불하다. 도로를 가리키며 맥스가 그 이유를 설명한다.

"This is ajsklgi#$%^glkaglisa'sp......."

집에 가서 알리샤한테 다시 물어보고 인터넷을 찾아본 바로는,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려고 능선에 따라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하고 높고 낮음이 있는 길은 걷는 사람에게 여유를 가지게 한다는데 이런 '저질(?)' 체력으로는 오르막 오르면서 여유를 찾기 힘들다.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길을 따라가는 중간중간에는 저수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도 역시 디자인된 것. 이것들로 마을사람들 물을 공급하고, 빗물은 받아 식수로 사용한단다. 물이 진짜 깨끗해 보여 수영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맥스가 하란다. 깊은 거는 9m라고.

흙으로 세수하고 싶다

▲ 크리스탈워터스 곳곳에 자리한 크고작은 저수지

           물이 아주 그냥 깨끗하다.

ⓒ 신혜정

▲ 처음 한 육체노동은 땅파고 말뚝 박기

ⓒ 신혜정

오전에는 머리 쓰는 일, 오후에는 몸 쓰는 일을 하기로 했다. 처음 한 육체노동은 땅파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육체노동 프로젝트는 지금 여럿 있는데, 일단 다음주부터는 맥스가 소 한 마리를 구해줄 거다. 젖 짜라고. 그 소를 위한 우리는 있는데 우리에 천막이 없다. 젖 짤 공간만이라도 산발적으로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천막을 쳐줘야 한다. 그 천막을 고정할 통나무를 땅에 박기 위해 땅을 파는 것이다. 삽과 다른 기구를 동원해 파다가 손으로도 흙을 퍼내봤다. 그 부드러운 느낌에 순간 멈칫한다. 어렸을 때 한창 흙장난하던 이후로는 흙을 만져본 적도 몇 번 없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전혀 메마르지 않았다. 풍부하고, 보들보들하고 미지근하다. 기분 좋아서 내내 만지고 싶다. 이 흙이라면 닭들이 모래로 목욕하듯 흙 목욕이라도 하고 싶다.

그래, 나중에 죽으면 아마도 정말 여기서 목욕하게 되겠지. 이렇게 흙이 되겠지. 다른 사람들 열심히 땅 파고 있는 중에 홀로 잠시 감동에 젖었다. 좋은 흙 분류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 있겠지. 지렁이가 있으면 좋고, 뭐가 몇 퍼센트로 섞여 있으면 좋고, 어디 지역에서 나면 좋고, 하겠지만 난 여기에서 내 기준을 깨달았다. 이런 흙이 좋은 흙이다. 언젠가는 우리도 여기로 돌아갈 거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흙이.

▲ 이 흙으로 세수하고 싶다

                      이런 흙이 좋은 흙 같다. 언젠가는 우리도 여기로 다시 돌아갈 거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흙이.

ⓒ 신혜정

땅도 파고 콩도 심고 브로콜리도 심고 걸어보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영어 듣기도 점수를 잘 줘도 50점이고. 알리샤랑은 같은 집 사니까 매일 보니 듣기가 한결 수월해서 알리샤를 가정교사 삼고 있다.

수업 때 못 알아들은 거 몇 개 단어만 기억해서 물어보면 알리샤는 착하게 대답해준다. 알리샤는 사교도 담당한다. 길 가다가 다른 사람들 만나면 얘기 나누는 건 알리샤한테 맡기고 옆에서 고개 끄덕이고 앉았다. 하지만 나아져야지. 이 분야 지식 배우는 거도 그렇고, 농사일에도 물론 익숙해질 거고! 이제 첫 주가 막 지나간다.

ps. 선물!

▲ 우리 사는 집, 포샵하니 훤하다

                 와우, 그야말로 초원의 집 아닌가. 남자 넷 여자 둘이라 남자 넷 한 집 여자 둘 한 집 쓰는데 어째 여자들 집이 더 크다. 쬐끔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쩌겠어 음캬캬캬

ⓒ 신혜정

▲ 안에서는 서로 모여 단소도 불고

                 그제는 토요일 밤이라 친구 만나러 간 샘 빼고 다같이 우리집에 모였다. 알리샤가 스튜랑 디저트를 만들어 저녁 먹고는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단소를 다들 시도해본다. 브렌단은 낙제.

ⓒ 신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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