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신 큰 복,사랑실천으로 보답" 故 김연준 박사 신앙과 삶

입력 2008. 1. 8. 18:15 수정 2008. 1. 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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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를 일기로 지난 7일 별세한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박사의 삶과 신앙은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투철한 기독교적 가치관 아래 교육사업과 음악, 언론, 사회사업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김 박사는 1914년 2월20일 함경북도 명천군 삼우남면 상장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병완 장로와 모친 김성녀 여사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김 박사는 부모님으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던 부친은 자택에 명천교회를 세우고 장로직분을 맡아 봉사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이런 영향 아래 자란 김 박사는 부친이 세운 명천교회 유치원에 다니며 음악적 소질을 인정받아 8세부터 교회 성가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김 박사는 우북공립학교와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시기는 그가 민족의식을 세우는 기간이었다. 그는 일본인의 우수성과 한민족의 열등함을 강조하던 일본 교무주임의 차별대우에 항의하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아 경성보통학교를 동기보다 1년 늦게 졸업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채플시간에 YMCA 구자옥 총무로부터 "기술 교육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말을 듣고 교육 사업을 결심한다. 훗날 그는 한양대와 한양공고, 한양대 부속 중고등학교, 한양여대를 설립한다.

김 박사는 청년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성동교회와 새문안교회에 출석했으며,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장로직을 받았다. 평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다"고 고백했던 그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표어 아래 한양대와 한양개발, 한양증권, 대한출판, 대한일보, 기독교신문 등을 설립했다.

그는 민간외교와 인권, 자원봉사에도 주력했다. 1970년대 초부터 김 박사는 민간외교관으로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방문하고 한·미관계 증진에 기여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또 국제인권옹호한국연맹 회장과 북한인권개선운동본부 총재를 맡아 인권 운동을 펼쳤으며, 한양대 병원을 설립하고 무료진료 등 의료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찬송과 성가 작곡에도 조예가 있었다. 구찬송가 92장 '어둠의 권세에서'는 김 박사가 작곡한 것이다. 이 찬송은 새찬송가(398장)에도 실려 있다. 이밖에 성가 210곡을 발표했으며, '청산에 살리라' '비가'와 같은 1400곡의 가곡도 발표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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