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추억으로 가는 군산∼전주 통근열차

2007. 12. 3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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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서린 '서민의 발' 95년..내년부터 장항선 대체

(군산=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사라지는 것은 추억이 된다'

1912년 개통 이후 서민들의 애환을 담고 달리던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통일호)가 31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해 첫날부터 장항선 무궁화호로 대체된다.

이 열차는 일제 강점기에는 호남평야 곡식이 일본으로 공출되는 수탈의 현장을 지켜봐야 했고 해방 이후에는 여객과 화물을 운송하며 지역경제의 기반이 됐다.

그래서 3량, 정원이 150여 명으로 초미니인 이 열차는 서민의 슬픔과 기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 열차는 오전 6시36분, 이맘때면 군산에서 새벽시장이 열린다

군산 인근의 서수와 임피, 개정에 사는 농부들이 정성껏 기른 호박이며, 무, 배추, 파, 콩 등을 새벽시장에 내다 팔아 현금을 손에 쥘수 있는 것도 이 열차 덕분이다.

초로의 신사와 아이 손을 잡은 아주머니, MP3를 듣는 대학생, 채소를 담은 커다란 함지박을 머리에 인 촌부까지, 저마다의 사연은 객실을 이내 사랑방으로 만든다.

특히 이 열차는 지난 70~80년대 이른바 도내 '빅3'로 명성을 날린 군산고(군산)와 남성고(익산), 전주고(전주) 등 명문고를 철로로 연결하며 '머리 좋은' 학생들의 통학수단으로 널리 애용되기도 했다.

시속 300㎞가 넘는 고속철도 시대에 진입했음에도 이 통근열차는 역무원이 배치되지 않은 개정역과 임피역, 오산리역 등 간이역도 절대 빼놓는 법이 없다.

간이역인 임피역은 1936년에 지어져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올라있으나 갈수록 이용객이 줄어 무인역으로 바뀌었으며, 이 역에서 기차를 타면 기차 안에서 차표를 끊어 준다.

출발지인 전주에서는 20여 명에 불과하던 승객은 역을 지날 때마다 불어나 100명을 훌쩍 넘긴다.

전주∼송천∼동산∼삼례∼동익산∼익산∼오산리∼임피∼대야∼개정∼군산까지 1시간 8분을 달리는 이 노선은 큰 산도 긴 터널도 없어 단조롭지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풍광과 호남평야를 가로지르는 넉넉함과 아늑함은 여느 열차에서는 맛볼 수 없다.

외길 철로를 달리는 열차 소리에 놀란 풀숲의 새들이 파드득거리며 눈내리는 들판의 허공 속으로 내뺀다.

달릴만하면 역이 나오니 시속 60㎞ 안팎의 더딘 속력일 수밖에 없다.

'계란이 왔어요, 오징어가 왔어요'라고 외치는 판매원도 없고, 담배를 피울만한 공간도 없이 하루 8편 운행(왕복)하며 승객들을 실어 나른다.

역에서 정차하는 시간이라고 해봤자 기껏 1분이지만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승객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 열차가 버스(터미널)와 비교해 도심과 접근성이 떨어져 경쟁력이 떨어지는데도 서민과 학생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요금이 싸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도 1400원(대인)이며 경로우대증을 소지한 노인은 600원으로 버스 4천400원에 비하면 30%도 되지 않는다.

몇 해전 완공된 전주∼군산 간 자동차 전용도로로 자가운전자가 늘면서 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예전같지 않지만 채소를 팔아 얼마를 벌 것인가를 점치거나, 책을 보거나, 차창 밖 풍경을 즐기며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즐기는 이들도 눈에 띈다.

공무원 이모(51.전주시 덕진동)씨는 "승용차로 전주역까지 온 다음에 열차를 탄다"면서 "자가용과 버스로 출퇴근을 해봤지만 이 열차만큼 넉넉한 공간과 여유로움을 주지 못한다"고 예찬했다.

한 할머니도 "생선 비린내와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더 움직여서 채소를 내다 팔아야 하는데 통근열차가 없어진다고 하니 걱정"이라며 아쉬워했다.

군산∼전주 통근열차가 폐지되는 새해부터는 익산역을 환승역으로 하는 출근 열차가 양쪽에서 1차례씩 운행된다.

전주에서 오전 7시23분, 군산에서 오전 7시30분 열차가 각각 출발해 익산에서 갈아타게 한 뒤 군산에 8시22분, 전주에 8시21분 도착한다.

ic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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